※ 나는 2018년 경 <정당 바로보기>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한 적이 있다. 학부생 수준에서 쓰여진 얇은 책이기는 하나, 나의 이러한 작업에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주는 지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다음의 글은 나의 책을 읽고 지인이 보내준 감상평이다. 부끄럽게도 아주 좋은 평가를 내려주었고, 이를 블로그에도 다시 게재한다.
최태준의 <정당 바로보기: 정치학으로 바라본 정당과 민주주의>를 읽고.
“한 편의 명문(名文)은 만약(萬藥)보다 낫다.”
소설 삼국연의에서 두통을 앓고 있던 조조가 자신을 규탄하고 토벌해야한다는 주장을 담은 진림의 ‘토조조서’를 읽고 한 말이다. 실제로는 귀순해온 진림의 다른 글을 보고 두통이 나았던 것과 귀순 이전에 쓴 글을 합쳐 조조의 호방함을 부각시키고자 한 허구의 이야기지만, 친구 최태준의 글을 읽는 지난 일 주일간 그로부터 받은 감명은 저 한 줄로 대신하기에 충분하다.
보름 넘게 이어지는 감기로 머리는 멍하고, 코는 막히고, 기침은 사레들린 듯 거칠고 잦았지만, 글을 읽는 동안에는 감기 걸린 줄도 모르고 글에 집중하였다. 물론 감기가 실제로 낫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진림의 글은 원소 휘하에 있는 진림의 입장에서, 암살을 기도했다고는 하지만 황제의 외척인 동승과 황제의 아이를 품고 있는 동귀비를 잔혹하게 살해한 조조의 잔인함과 부도덕함을 근거로, 목적인 조조 토벌을 위해 천하 제후들의 동조 또는 방관을 요구하는 글이었다. 진림의 입장을 고려해보았을 때, 글은 더 없이 시의에 부합하고 합목적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규탄 당하던 조조마저도 그 글의 위력을 깨닫고 모골이 송연해질 만큼.
‘정당 바로보기’는 이러한 시의에 부합하고 합목적성이 뚜렷하며, 저자인 학부생 최태준의 입장과 학식에서 나올 수 있는 최고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학을 공부한 독자인 내게 이 글은 뭔가 대단한 창의가 깃들어 있어 사로가 트이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해주는 글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글은 정치에 관심을 가지려는, 그러나 정치학을 공부한 적은 없고 깊게 공부할 생각도 없으되 다만 큰 비용 없이 정치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민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분량은 B6용지 205페이지로 작고 얇다. 언뜻 두 시간이면 읽겠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야말로 알 찬 내용과 유기적인 연계로 정치에 관한 시민들의 순진한 낙관과 허망한 기대, 근거 없는 편견들을 하나하나 들춰 내주는 역작이다.
그의 글에는 탄핵 정국을 통해 비로소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참여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시민들이, 근거 없는 편견과 기대를 품고 있다가, 스스로 배신당하고 스스로 절망하여 정치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있다. 그러나 그 따뜻한 마음은 겉으로는 냉정하고 다소는 잔인할 정도의 현실적인 충고와 일깨움으로 전해진다.
글은 먼저 저자의 말에서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핵심이 되는 정당의 역할이 과도하게 부정적으로만 비춰지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곧바로 책의 목적을 ‘이러한 부정적 생각들을 타파하고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는 어떤 것인지 설명하고 이를 발전시키기 위한 고민을 확장하자’로 정의하였다. 최태준은 책의 대부분의 내용을 이 ‘부정적 생각들’을 타파하는데 할애하고 있는데, 이러한 부정적 생각들은 시민들의 정치, 민주주의, 정당에 대한 체계 없는 이해가 불러온 것들이 대부분이다. 본문의 표현들이 유기적으로 이뤄져 있기에 직접 발췌해서는 그 문맥을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아래는 최군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나름대로 이해하여 축약해 보았다.
● 직접민주주의 또는 광장민주주의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인 것처럼 최근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여론정치는 되려 권력 있는 이들,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는 사람들, 시민 다수를 현혹할 수 있는 데마고그에게 권력을 집중시켜주고, 소수의견과 부분이익들을 매몰시킨다.
● 정치는 기계적으로 도덕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실천 가능성을 고려하여 현실과 도덕 사이의 어딘가, 갈등을 봉합하는 타협점을 찾는 것이다.
● 기성 제도권 정치에 대한 무조건적인 냉소는 이러한 냉소를 낳았던 제도권 정치의 ‘비민주성’을 오히려 강화시키거나, 극단적인 혁명론, 무정부주의로 치달을 수 있다.
● 민주주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거나, 국민 전체의 공익이라고 하는 존재하지도 않는 모호한 개념을 실현하는 체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집단들의 열정과 대안들이 보다 공개적으로 드러나고 경쟁할 수 있도록 하는 체계이다.
● 선거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민주주의가 완성 됐다고 할 수 없다.
● 갈등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존재하는 갈등을 부정하게 되면 사회는 전체주의로 흐르게 된다.
그 외에도 많은 정치에 관한 왕정시대의 유물과 같은 사고들을 지적하고 반박하고 있어, 정치학도로써의 훈련을 받지 않은 시민들의 편견들을 깨뜨려주고 있다. 이러한 편견들을 깨뜨리는 가장 강력한 기준은 실천가능성으로, 최군은 독자들에게 좋은 사회는 민주주의 제도만을 들여온다고 해서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포괄적이고 범 국민적인 운동을 벌인다고 해서 실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지적을 한다. 광장에 모이는 시민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는 정당정치가 취약해 시민들의 목소리가 제도권 정치에 전달되지 못하고, 시민들이 정치로부터 유리되고 있음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 역시 과거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비록 국제정치학이 주 전공이지만, 정치학을 전공했다는 말에 많은 주변인들이 개별적인 정치 이슈에 대해 질문해 온 일이 있었다. 나는 알고 있는 내용에 한해서 최대한 상세하게 설명해주려고 했지만, 결국엔 개별 이슈에 대한 개인적인 가치판단에 불과했던 것 같다. 더욱 중요했던 건 시민 스스로가 민주주의에 대해 차분하고 현실적인 시각을 가지고, 사회 갈등을 직접 인식하고, 이에 대해 자신의 입장과 이익을 판단하고, 대안을 선택하게끔 유도하고 정치 참여의 비용을 낮춰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지역구 국회의원들이 지방 선거 공천을 좌지우지하며 사실상 지방 토호노릇을 하고 있다는 보도를 전해들은 바 있다. 중앙집권정도가 높고, 지방 자치 수준이 낮은 편인데다가, 지역구 국회의원들이 중앙 예산을 타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지방 선출직들에 대해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최군의 주장과 같이 풀뿌리 정당조직이 강력했다면, 시민들이 정당 속에 들어가 보다 구체적인 참여가 이뤄졌더라면, 과연 ‘지방 선거가 중앙 이슈에 매몰되었다’와 같은 주장이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18세기 프랑스가 아니고서야 공부만 해선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 어려운 낭만주의적 정치학도 주제에, 민주주의를 현실적으로 보라는 글을, 학부 시절에 펴내고야 만 최군의 이중성에는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의 숭고한 노력은, 먹고사니즘의 현실주의와 진정한 의미의 ‘실천 가능성’이라는 기준에 따라 판단을 하는 현실주의는 엄밀히 다른 것임을 보여준다. 그는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가치를 내던지고 물질적인 성취만을 추구하는 것을 현실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적자산과 환경을 토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을 했고, 해냈으며, 무엇보다도 훌륭하게 해냈다. 비슷한 환경에 있음에도 제대로 된 글은커녕 리뷰조차 차일피일 미루다 6개월이나 지나 쓴 내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독특한 취향을 가져, 이 일천한 리뷰를 읽고 ‘정당 바로보기’를 읽게 되는 독자들이 있다면, 민주주의에 대해 ‘실천 가능한’ 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최군과 같이 자신이 성취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을 위해 행동에 나서, 아직 제도만 갖춰진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무서운 시민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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