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지, 그랬었지.

글을 쓰다보면, 그게 어떤 종류이건 간에, 괜히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 생긴다. 잘 직조된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서는 지난 사상의 궤적을 훑어보는 작업도 필요하고, 나의 지난 행적들을 돌아보며 통렬히 반성하는 것 역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수많은 사건들은, 나 자신의 부족함과 왜소함과 비루함을 한없이 극대화시켜 보여주며 나를 우울하게 하곤 한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그랬지. 그랬었지."하고 중얼거리게 되면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랬지, 그랬었지." 얼마나 쉽고 단순한 말인가. 이미 지나간 시간, 그 때로 돌아갈래야 돌아갈 수도 없는, 기억의 저편에서만 존재하는 그 시간들을, 단 두 마디에 눌러담아 흘려버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인간이 후회할 수 있는 동물이라는 게 이럴 때만큼은 다소 원망스럽기도 했다.

아직은 내가 어리구나, 싶다. 어리광을 부려도 될 나이는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어리다.

초등학생 시절의 꿈

우연찮은 계기로 초등학교 졸업앨범을 보게 되었다. 새로 구입한 키보드를 설치하기 위해 기존에 쓰던 키보드를 떼어내어 책장 꼭대기에 올려놓았는데, 마침 그 자리에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졸업앨범들이 고이 모셔져 있었다. 꽤 오래 전 방에 있는 가구를 재배치하면서 그 자리에 놓아두었는데, 바로 고개만 들면 보이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그 존재를 까먹고 지냈던 터였다. 무척 오랜 시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곳인지라 앨범 위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앨범을 집어들어 먼지를 닦아내고 펼쳤다. 비닐에 쌓인 수험표가 웬일인지 그곳에 끼어있었고, 학교 다닐 적 선생님들이 학습지나 공문을 배포할 때면 으레 사용하던 갱지 역시 보였다. 하나하나 들춰내고 나니, 초등학교 6학년의 앳된 내 모습이 보였다.

6학년 1반을 찾아 펼쳤다. 담임 선생님의 얼굴이 먼저 보였고, 그 아래에는 단체 사진이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꽤나 젊었다. 또한, 판서가 인상적이었다. 나의 노트 정리 중 많은 부분은 그 선생님께 배운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선생님이 정갈하게 번호와 기호를 붙여가며 개요를 나눠 판서해놓으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 적었다. 나는 그저 그것을 외우기만 하면 되었다.

그 다음 장에는―모든 졸업앨범이 그렇듯이―학급 동기들의 개별 사진이 담겨 있었다. 사진을 펼쳐보고 제일 먼저 눈이 갔던 것은 이름이었다. 익숙한 이름들이 눈에 밟혔다. 다들 어디에서 뭘 하고 지내고 있을까. 벌써 14년이 흘렀다. 다들 지금쯤 사회 어딘가에서 제 역할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터였다. 그들의 소식을 부러 궁금해할 필요가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다른 것이 눈에 들어왔다.

꿈.

다들 저마다의 꿈이 있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현재 자신의 꿈을 이룬 듯 보였다. 페이스북의 ‘알 수도 있는 사람’ 알고리즘은 얄궂게도 내 의사와는 관계 없이 그들 중 몇몇의 근황을 내게 알려주었다. 꿈을 이룬 이들. 한없이 부럽게만 느껴졌다. 문득, 나는 어떤 꿈을 써놓았는지 궁금해졌다. 내 사진을 보니, 하단부에 '변호사'라고 적혀 있었다. 초등학생 때 나는 변호사를 꿈꿨구나. 나는 변호사가 되고 싶어 했구나.

어느 순간 내게서 그 꿈은 사라졌다. 아마, 기억하기로는 내게 변호사/검사/판사가 되어야 한다고 늘 강조하시던 아버지의 존재가 나로 하여금 '변호사가 되고 싶다'라고 말하게 만들었으리라. 물론 졸업앨범을 찍을 시점에서는 아버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분이셨으나.

지금의 나는 꿈이 있는 사람인가, 하는 질문이 생겨났다. 꿈이라면 있기야 하다. 다만 어떤 직업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무척 소박한(?) 꿈이 되었다는 게 조금은 차이점이지만. 사회적으로 성공이라 여겨지는 기준에서 보자면, 나는 꿈을 잃어버린 사람에 가깝다. 나는 무슨 꿈을 가지고 있는가. 하루에도 몇번씩 반복해서 내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지만 딱히 만족스러운 답변은 나오지 않는다.

내가 꿈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꿈을 생각할 수 있을만한 여유가 사라진 것인가. 언젠가 꿈을 다시 생각할 수 있을 때가 돌아온다면, 꿈을 되찾고 싶다. 마음 속에 묻어둔 꿈들을, 다시 한번 열 수 있을 때가 오긴 할까. 지금은 비록 자물쇠가 굳게 잠겨 있지만, 그 때가 오긴 하겠지. 그래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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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9일, 리뷰아카이브에 기고했던 글이다. 원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들어가며


가장 잔인한 곳이 어떤 곳이냐는 질문이 던져지면, 나는 지옥을 고르기보단 차라리 현실 정치무대를 고른다. 막스 베버가 말했듯이 정치는 언제나 결과로 말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한 번 실패하면 다시 되돌릴 수 있는 게임이 아니라, 한 번의 실수 내지 잘못이 국가적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 정치의 영역이다. 물론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들이 정당한 것이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충분히 분분한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좌우간 정치의 영역이 대단히 혹독한 평가의 장이라는 데에서는 대부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건강한 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각자가 이견이 있을 수 있겠다. 그렇다면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 건강한 정치가 만들어지기 위한 조건이 무엇이냐고 따져 물었을 때 선결되어야 할 과제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어떤 대답들이 가장 많이 나올까. 나는 개인적으로 ‘강한 진보정당의 성장’이라는 데에 대부분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정치에서 정당 구조는 반공 이데올로기 위에서 세워진, 대단히 협애한 이념적 스펙트럼만을 가지는 지역 정당 체제라고 요약된다. 이러한 정당 체제 안에서 동원될 수 있는 갈등은 매우 제한된다. 최장집 선생의 주장에 따라, 한국의 정당 민주주의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라고 요약될 수 있다. 노동 없는 민주주의란, ‘노동’ ‘노동조합’ ‘노동3권’ 등 노동과 관련한 모든 의제와 텍스트들이 강고한 반공 이데올로기로 인해 마치 북한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는 듯한 연상효과를 가짐으로써 억압되어 온 현실을 가리키는 말이다.[각주:1]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민주화 이후 지난 30여 년의 역사 속에서 이런 정당 체제가 오래도록 지속되지 못한다는 증거가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2000년 노동자-서민의 계급적 이해를 대표하겠다고 등장한 민주노동당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그 기대와 희망과는 정반대로, 초반에 성장하다가, 급기야 통합진보당으로 개편한 뒤 헌법재판소의 해산 심판을 통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러한 민주노동당의 성장과 실패의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를 통해, 2017년 현재 진보정당의 위치를 가지고 있는 정의당은 미래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번 글에서 함께 살펴볼 논문은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의 정재관, 김인원, 정은아 교수가 함께 공동으로 연구한 「틈새정당의 전략과 제도화: 민주노동당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연구」(『한국정치학회보』 50(2), 2016.6, pp.125-149)로써 민주노동당이 왜 실패했는지, 또 어떤 요인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가늠해보고 그를 통해 현재적 의미를 찾아볼 것이다.


틈새정당 이론


먼저 간략한 개념부터 살펴보자. 틈새정당(Niche Party)이란 기존 정당체제에서 포괄되지 않는 이슈를 바탕으로 유권자를 동원함으로써 성장을 시도하는 신생 정당들을 일컫는다. 메귀드(Meguid 2007)는 틈새정당들이 성장하고 성공하고 실패하는 다양한 이유를 정당의 전략적 결정과 정당 간의 상호작용이라는 틀을 통해 설명하려고 한다. 메귀드의 이론은 단지 정당이 점유하는 이념적 위치(Position)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제기하는 정책의 중요성(Salience)과 그 이슈의 소유권(Ownership)까지 포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메귀드는 본인의 이론을 PSO이론이라고 지칭한다.


이 이론의 핵심은 틈새정당의 성공과 실패는 이념적 스펙트럼 상의 좌우 유권자를 선점하고 있는 기존의 정당들의 전략적 선택에 따라 틈새정당의 성패가 갈린다는 것이다. 기존 정당들은 틈새정당이 출현할 경우 그들의 점유율을 늘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그들의 영향력을 억제하고 그들이 동원하는 표들을 자신들에게 가져오도록 노력할 것이다.


기존 정당들이 틈새정당의 등장에 대응하여 취할 수 있는 전략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틈새정당이 제시하는 이슈를 무시함으로써 그 이슈의 중요성을 떨어뜨려버리는 ‘무시전략(dismissive strategy)’이고, 둘째는 틈새정당이 자리하고 있는 이념적 위치에 가깝고 먼 정도에 따라 ‘적응전략(accommodative strategy)’과 ‘적대전략(adversarial strategy)’을 취하는 것이다. 적응전략은 틈새정당과 이념적 거리가 가까운 기성정당이 틈새정당이 제시한 이슈를 흡수하면서 이슈의 소유권을 기성정당 쪽으로 가져오는 전략을 말하고, 적대전략은 틈새정당과 반대편에 있는 정당이 최대한 틈새정당의 이슈를 각인시킴으로서 유권자로 하여금 이슈의 소유권이 틈새정당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그를 통해 상대편에 있는 기성정당의 지지자들이 틈새정당 쪽으로 이탈하도록 부추기는 전략을 말한다.[각주:2]


이러한 PSO이론은 분명히 틈새정당의 성장과 성공 및 실패에 대해 일관된 분석틀을 가져다주었다는 이점은 분명히 있으나 논문의 저자들은 이러한 이론이 틈새정당의 능동적 활동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민주노동당을 틈새정당이라 할 때, 그들의 성공과 성장에는 분명히 민주노동당 자체의 능동적인 전략과 선택이 있었다. 민주노동당의 성장은 적극적은 노동운동과 진보정당 건설 운동이 결합된 결과물이며, PSO 이론을 통해 설명하기 어려운 난점이 존재한다.[각주:3]


논문 저자들은 메귀드의 틈새정당 이론은 비판적으로 보며 틈새정당을 수동적 행위자가 아닌 능동적 행위자로서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틈새정당이 성공할 수 있는, 즉 득표를 가장 극대화할 수 있는 전략은 중화(Neutralization) 전략과 유인(Inducement) 전략이다.


중화전략이란 틈새정당이 제기하는 이슈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며 정책적 차별성을 강화함으로써 기성정당이 이슈를 선점하려는 것을 막고 기성정당 지지 유권자들을 틈새정당 지지로 전환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말한다. 반면 유인 전략이란 이념적 지형 반대편에 위치한 기성정당이, 틈새정당이 제기하는 이슈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도록 만듦으로서 이념과 정책상 대비를 선명하게 하도록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요컨대, 중화-유인 전략이란 이슈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그를 통해 정책적 차별성을 드러내는 전략을 말한다.


민주노동당은 이러한 전략을 제대로 수행했는가? 다음에서 살펴볼 정당의 제도화 수준이 심각하게 낮았기 때문에 민주노동당은 효과적인 전략을 수립할 수 없었고 또 집행할 수도 없었다. 


정당의 제도화, 그리고 민주노동당


민주노동당이 실패했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정당의 제도화 수준이 대단히 낮았다는 데 있다. 파네비앙코(Panebianco 1988) 및 랜달과 스바샌드(Randall and Svasand 2002)가 제안한 정당 제도화 수준을 평가하는 네 가지 지표는 다음과 같다. ① 당내 조직적 체계성의 정도 ② 당 지도부의 의사결정 자율성 정도 ③ 구성원 사이에 지향하는 가치의 동질화 정도 ④ 유권자들로부터 얻는 지속적 실체성의 정도가 그것이다.


“높은 제도화 수준을 보이는 틈새정당일수록 선거경쟁에 참여해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고 논문저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한 정당의 제도화 수준을 평가하는 것은 그 정당의 성패를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다. 정당의 성공과 실패 여부는 언제나 선거로 결정지어지기 때문이다.


논문 저자들은 민주노동당의 제도화 수준을 앞서 제시한 네 가지 기준에 따라 비판한다. (1) 당내 조직적 체계성의 정도는 당내 계파 및 정파 갈등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하락했고 (2) 당 지도부의 의사결정 자율성 역시 집단지도체제로 변화하면서 극히 취약해졌고 (3)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자주파와 평등파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가치적 동질성이 대단히 극심했으며 (4) 마지막으로 이러한 경향으로 말미암아 유권자들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대중성을 상실했다는 것이 비판의 요점이다.


논문 저자들은 이러한 주장들에 대한 상세한 지표들을 제시한다. 일례로 민주노동당이 조직으로서 체계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단지 당내 분열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 자체가 능력 있는 정당으로서 신뢰를 보일 수 있는지의 여부 역시 중요한 요인이다. 민주노동당의 정책 개발비는 아래 표에서 보다시피 대단히 낮은 비율을 보이는데, 이는 2005년 당시 한나라당의 정책개발비 비율이 20.6%에 이르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대단히 낮은 수치이다.

 

정재관, 김인원, 정은아(2016)에서 발췌


 또 하나, 이로 인해 유권자들은 민주노동당이 과연 정당으로서 제기한 이슈들을 효과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질 수 밖에 없고 그 결과물은 아래 표에서 보다시피 지지율 하락으로 드러났다.

 

정재관, 김인원, 정은아(2016)에서 발췌


진보정당의 현재와 미래?


민주노동당의 실패는 우리에게 여전히 큰 시사점을 안겨준다. 그것은 단지 한국의 정당 구조 안에서 진보정당이 살아남기 어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정당이 충분한 능력과 실력을 갖추어야 함을 말한다. 논문 저자들은 브라질 노동당의 사례를 들며 결론을 짓는다.


논문 리뷰를 끝마치며, 나의 사견을 잠깐 덧붙여보겠다. 나는 거의 습관처럼 ‘능력 있는 정당’에 대해 말하곤 한다. 민주주의는 유능한 정당, 유능한 정부를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어떤 것을 해결해줄 마법사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것을 해결해줄 유능한 정부와 정당을 우리 손으로 고르게 해주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의미가 다소 희석되어 오늘날에는 마치 ‘당내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완성이자 실현인 것처럼 주장되는 경우도 더러 있는 것 같다.


나는 진보정당이 보다 강하게 성장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들이 충분히 수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또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민주노동당의 실패에서 우리는 한국 정당 체제의 악랄함(?)과 경직성을 규탄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성장할 수 있는 능력과 조건을 갖춰가도록 역량을 키우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본다. 다양한 정당이 있고, 또 그럴 때에라야 민주주의는 비로소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틈새정당이 유의미한 경쟁자로 성장하는 것은 꽤나 가치있고 고무적인 일이다. 거대한 반공보수주의가 비록 여전히 가로막고 있지만, 지난 선거에서 드러났듯이 이러한 정당 구조는 또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지금 상황에서 정의당이 처한 상황이 대단히 유리하고 또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정의당은 그 어떤 때보다 성장의 적기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정의당 내부에서의 잡음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내부의 상황이야 알 길이 없으니 공식적인 언론 보도만을 신뢰할 뿐인데, 여러 가치 의제들이 충돌하면서 벌어지는 잡음인 것 같다.


대중성을 가지지 못한 정당은 결국 무너지고 만다. 앞서 제시했던 정당 제도화의 네 가지 수준 중 마지막, 유권자들 사이에서의 지속적인 실체성은 유권자들이 그 정당을 얼마나 지지하느냐의 여부이다. 대중이 지지하지 않는 정당은 선거에서 질 수 밖에 없고 또 유의미한 성과를 내기도 어렵다.


나는 여전히 아주 미약하나마 희망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그 희망이란,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조금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다. 그러나 보다 현실적으로 눈을 돌리자면, 그 희망이 보다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틈새정당의 성장이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희망은 항상 ‘유보적’이다. 진보정당이 성장하여 당당한 경쟁자가 될 수 있는 그 때가 언제쯤 올 수 있을까?

  1. 이를 두고 ‘이념적 불러내기’라고 칭한다. [본문으로]
  2. 정재관, 김인원, 정은아(2016), “틈새정당의 전략과 제도화: 민주노동당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연구”, 한국정치학회보 50(2), pp.132-133 [본문으로]
  3. Ibid. p.134 [본문으로]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영화 포스터


    실로 오랜만에 책 한 권을 완독하였다. 책을 읽으며, 정말 오랜만에, 울 뻔 하기도 했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영화로 처음으로 접했더랬다. 그 여운이 무척 오래 남아, 한 번 시청한 후 조금 시간이 흐른 뒤 한 번 더 시청했었다. 반복하여 시청해도 여운은 무척 길었다.


    책으로 읽은 것은 처음이다. 오랫동안, 소설이 원작이니 소설을 읽어보라는 권유는 익히 들었지만, 최초 영화를 시청한 시점─나는 작년부터 내가 보았던 영화나 드라마, 읽은 책들을 모두 기록하여 저장해놓고 있다─에서 만 1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책을 읽다니, 작품은 물론이고 작가에 대해 대단한 죄책감(?)이 느껴진다.


    소설을 읽고 울어본 게 얼마만이더라. 정말 울 뻔했다. 아니, 울었을게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정도였으니까. 소설 자체를 자주 읽지 않는 타입이다보니, 소설을 읽고 눈물을 흘려본 게 실로 처음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지난 1년 간 나는 거의 책을 읽지 않았다. 읽었더라도, 열 두어페이지 쯤 보다가 말았던 게 전부다. 그게 아니라면, 읽었던 것을 또 읽거나. 새로운 책을 읽어야지, 생각만 하다가 결국 지난 1년은 그렇게 보내버리고 말았다. 내 곁에는 하도 반복해서 읽은 나머지 표지가 바래버린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있고, 미처 다 읽지 못한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가 있었다. 한 편의 책을 다 읽은 후 느껴지는 길다란 여운을 얼마만에 느껴보는 것인지.


    이하는 몇 가지 단상.


   첫번째, 작가는 왜 주인공의 이름을 마지막에 배치했을까. 주인공의 이름은 시종일관 "사이 좋은 클래스메이트", "따분한 클래스메이트" 따위로 불리고 있었다. 이름이 언급되어야 할 자리는 "???"로 처리돼 있었다. 주인공의 이름은 사라진 채, 그 자리에는 사쿠라, 교코와 같은 타인의 이름들만이 남아있었다.


    사쿠라는 주인공을 향해 "너는 항상 너 자신이었다"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서술방식에서 주인공은 비록 1인칭 시점이었지만, 그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쿠라가 사망한 후에야, 비로소 나는 그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이름은 곧 자신이다. 이름이 없이 "따분한 클래스메이트" 따위로 불리던 그 순간에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었다. 이름이 없던 그는, 사쿠라를 통해 비로소 이름을 찾았다. 사쿠라가 주인공을 표현한 것과, 주인공이 이름을 찾게 되는 모습은 무척 모순되는 것처럼 보였다.

    

    두번째, 사쿠라의 집에서 사쿠라가 주인공을 향해 장난쳤을 때, 주인공을 처음으로 분노했다. 그리고 말 그대로 사쿠라를 덮쳤다─라는 표현이 사실 적절한지는 모르겠다만 여하튼 그렇다. 사쿠라의 장난이 비록 짓궂은 장난임에는 틀림없지만 주인공이 무엇 때문에 분노를 느꼈을지는 사실 잘 공감되지 않았다. 어쩌면 이 부분은 웬만한 장난에도 화를 잘 내지 않는 내 성격에서도 기인하는 바가 클 것이다. 그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표현한 바, 어쩌면 주인공이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바라보기 시작한 계기가 아니었을까, 하고 지레 짐작할 뿐이다.


    세번째, 주인공은 제법 말장난을 잘 받는 성격이다. 이게 일본식의 감성인지 어떤지는 모르겠다만, 주인공의 말재간은 제법 능글맞기도 하고 재치있는 구석이 많이 보였다. "아무도 오렌지를 튀김으로 해먹을 생각은 안할거야"라든가, "이 몸은 태생이 고귀한 몸이라서-"라든가, 뭐라고 표현할까, 내가 좋아할 법한 그런 재치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읽는 내내 문장에서 묻어나는 귀여움에 미소지었다.


    주인공의 울음은 아마 평생 가도 잊지 못할 것 같다. 그의 울음은 비록 몇 개의 느낌표와 몇 마디의 감탄사로 이뤄진 짧은 것이었지만, 나는 그의 울음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늠한다, 라고 하면 조금은 오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울음에서 느껴지는 깊이랄까, 짙음 같은 것이 내게는 느껴졌다.


    오랜만에 좋은 소설을 읽었다. 왜 이 소설을 읽은 사람들이 "주변인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고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다시, 책을 읽어나갈 용기 역시 부여받았다. 조만간 부분부분 필사한 것 역시 올릴 것이다.

2017년 10월 5일 <리뷰 아카이브>에 투고한 글이다. 원문은 여기서 볼 수 있다.


정치지식과 계급투표


예로부터 ‘정치에 대해 잘 알면 알수록 진보정당에 투표할 것이다’라는 근거없는 믿음이 있었다. 소위 ‘깨어있는 시민’ 논리는 바로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상이 아닐까 한다. 즉, 정치에 대해 ‘깨어있’다는 것은 그만큼 정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말이고, 그러한 사람들은 정치의 부당함과 불공정한 현실에 분노할 줄 아는 사람들이므로 진보정당에 투표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경험적으로 증명된 바 없는, 다분히 레토릭적인 측면이 강했던 것이 사실이다. 나아가 실제로 정치에 대한 지식이 투표에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지 역시 증명하기 어려웠다.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진보정당에 투표를 할까? 이 질문을 조금만 바꾸어서, 정치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계급투표를 할 가능성이 높을까? 계급투표란, 자신의 계급적 지위에 맞는 투표를 한다는 말이다. 하층 노동자라면 진보정당을, 상층 자산가라면 보수정당을 뽑는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연구에서 한국의 투표는 계급투표보다는 계급’배반’ 투표(class betrayal)를 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고 있다. 정치지식은 이러한 계급투표에 어떤 영향을 끼치나? 이번 리뷰에서 살펴볼 논문은 오수진[각주:1], 박상훈[각주:2], 이재묵[각주:3]「유권자의 계급배반과 정치지식: 제 20대 총선에서 나타난 투표행태를 중심으로」(『한국정치학회보』 51(1), 2017, pp.153-180)으로, 정치지식과 계급배반 투표 사이에 나타나는 상호작용을 살펴볼까 한다.


계급투표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


계급투표에 대한 기존 연구는 어떤가? 계급균열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선행 연구들 중 어떤 것들은 계급투표가 더 이상 유효한 인자가 아니라고 간주한다(Inglehart 1977, Clark and Lipset 2001, 40; Pakulski 2001, 153). 한 편 최근의 또다른 연구들은 계급투표가 변화를 겪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중요한 균열 중 하나라고 간주한다(Evans 1999; Van der Waal et al. 2007; Kim 2010). 균열(cleavage)이란 “한 사회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회세력들 간의 이해관계가 역사적이고 문화적으로 구조화됨에 따라 소속 구성원들을 일정하게 분리시키는 기준”이다(Lipset and Rokkan 1967).


한국에서 이러한 균열을 수행하는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 한국에서 주요한 균열은 이념, 지역, 세대라 할 수 있다. 때문에 그간 한국에서 선거 연구는 이념, 지역, 세대를 중심으로 펼쳐져 왔다. 2000년 이전 선거에서는 지역이 주로 부각되었다면 이후의 연구는 세대와 이념을 부각하고 있다(강원택 2003, 2010). 반면, 한국에서 계급투표에 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미진한 편이다. 계급 갈등이 오랜 기간 억압당해왔고, 비례적이지 못한 선거제도와 낮은 사회적 이동성 때문에 유효한 균열의 수준까지 심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어떤 논자들은 주장한다(강원택 2010, 장승진 2013b). 한국에서 계급투표는 그 정치적 배경과 토양으로 말미암아 저소득층이 진보정당을, 고소득층이 보수정당에 투표하는 것이 아닌, 저소득층이 보수정당을, 고소득층이 진보정당에 투표하는 현상, 즉 ‘계급배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이들은 주장한다.[각주:4]


강원택(2013) 교수는 여기에 대해 하위계급에서 왜 보수적 성향을 보이는지에 대해 고찰한다. 강원택 교수는 교차분석을 통해 한국 유권자들의 계급 배반적 투표 경향의 이면에는 고령층의 보수적 성향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저소득층 다수가 고령층이고, 고령층은 전쟁과 산업화라는 정치사회화의 과정을 거치며 보수적 선택을 한다는 말이다.


누가, 어디에 투표하는가?


정치지식은 계급투표에 어떤 영향을 줄까?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보이고 있다.


오수진, 박상훈, 이재묵(2017)에서 발췌

 

다른 부분은 제외하고, ‘계급/정치지식” 항목을 보자. 모형 (2)와 모형 (4) 모두 정치지식이 계급투표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유효하다는 말일까?


오수진, 박상훈, 이재묵(2017)에서 발췌


그림 <1>은 하위/중하위 계급에서 정치지식이 높아질수록 새누리당을 선택할 확률이 높아짐을 나타내고 있다. 반대로 상위계급에서는 정치지식이 높아질수록 새누리당을 선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다른 그림을 보자.


오수진, 박상훈, 이재묵(2017)에서 발췌


그림 <2>는 상위계급에서 정치지식이 높아질수록 더불어민주당을 선택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히려 하위계급과 중하위계급에서 정치지식이 높아질수록 보수정당에 투표할 확률이 높아질 가능성을 나타낸다.


연구의 함의


본 연구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유권자의 정치지식은 계급투표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림 <1>과 <2> 모두 유권자의 정치지식이 높아질수록 계급 배반 투표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연구자들은 “수요자로서의 유권자들이 자신이 속한 계급에 대해 ‘오인’(misperception)하고 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자신이 경제적으 로 처해 있는 계급적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처럼 정치지식의 수준이 높을수록 유권자 자신의 계급이 상대적으로 우위 또는 하위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 진보정당 또는 보수정당에 대한 역전된 지지 및 투표 선택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연구자들이 제시하는 하나의 가능성이다.[각주:5]


계급투표가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다양할 수 있다. 필자의 짧은 식견으로는 그것을 전부 풀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정당 체계의 협소함 역시 하나의 원인이 아닐까 한다. 계급투표가 활발하지 않은 이유는 정당 간 경쟁에서 이념적 정체성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며 이것은 유권자로 하여금 분명한 이념적 갈등에 기초한 투표를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불분명한 모호성에 기대어 투표하도록 만들 것이라는 가능성이다.


계급투표가 활발해지는 것이 곧 정치를 튼튼하게 만드는 것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계급투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음으로써 계급적 균열이 쉽게 은폐되고 저지된다는 것은 예측할 수 있다. 정치지식은 이러한 계급투표에 영향을 미치는 한 인자라고 볼 수 있다. 본 연구는 그런 점에서 계급투표에 있어 정치지식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본 연구라 말할 수 있겠다.

  1. 한국외대 박사과정 대학원생. [본문으로]
  2. 한국외대 석사수료 [본문으로]
  3.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본문으로]
  4. 오수진, 박상훈, 이재묵, 유권자의 계급배반과 정치지식: 제 20대 총선에서 나타난 투표행태를 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보』 51(1), 2017, pp.153-180 [본문으로]
  5. Ibid. p.174 [본문으로]

2017년 10월 5일에 <리뷰 아카이브>에 투고한 글이다. 원문은 여기서 볼 수 있다.


들어가며: 정당정치의 위기와 오해들


정당 문제에 관한 한 한국에서의 인식은 아직 그리 진전되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정당 조직을 이해하는 문제에 있어 ‘이것 아니면 저것’ 식의 이분법적 대립구도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듯 하다. 다분히 필자의 짧은 경험에 기대는 인상비평이긴 하나 한국에서 정당만큼 인식의 발전이 더딘 것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정당 정치가 위기라고들 하는데 대체 무엇 때문에 위기인가? 정당이 여전히 대중조직의 형태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인가? ‘포괄정당(catch-all party)’로의 획기적 전환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가? 한국의 정당이 선거에만 골몰하는 카르텔 정당이기 때문인가? 정당 조직은 어때야 하는가? 한국의 정당 조직은 무엇이 문제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들은 언제나 유보적이었다. 조직의 문제는 이론화하기 어렵고 또 현실의 구체적인 양태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일관된 이론 체계로 설명하는 것이 곤란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민주주의를 이루는 세 가지 축을 고르라면 시민사회와 정당, 그리고 정부일 것이다. 세 가지 연결고리가 순환적으로 잘 작동할 때 민주주의 역시 건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정당은 종종 무시되기 일쑤였고, 시민사회의 강건함을 ‘운동’을 통해 건설하고자 한다든지 혹은 시민사회와 정부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직접민주주의’가 중요한 화두로 각광받아왔다. 정당이 설 자리는 이런 논의에서 끼어들 틈이 없었다. 정당 조직이 구식이고, 낡았으며, 계파정치나 일삼는 퇴화한 조직이라는 비난은 정당이 으레 받게 되는 비난이었다.


한국에서 정당조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본 리뷰에서는 비록 오래된 논문이지만, 강원택 교수「한국 정당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 정당 조직 유형을 중심으로」(『한국정당학회보』 8(2), 2009, p.119-141)를 살펴봄으로써 한국에서의 정당 연구에 대한 인식을 환기해보고자 한다.


정당조직을 인식하는 문제


한국에서 정당정치를 연구하는 데 있어 발생하는 문제 중 하나는 서구 유럽의 경험을 중심으로 정당 정치의 발전을 바라볼 때 정당정치의 발전이 일종의 ‘방향성’을 갖는다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 서구 유럽의 정당 정치가 발전해오는 과정, 즉 간부정당(cadre party)에서 사회조직 중심의 대중정당(mass party)으로, 대중정당에서 다시 선거 자원 획득을 위해 중도층을 포괄하는 포괄정당(catch-all party)으로, 포괄정당에서 다시 국가에의 의존도가 강해짐에 따라 카르텔 정당(cartel party)로 변화해갔다는 인식이다. 정당 조직이 일종의 ‘진화’ 과정을 겪어왔다는 생각인데, 과연 이런 생각은 타당한가?


강원택 교수는 이러한 방향성을 가진 인식을 두고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첫째 과연 정당 조직이 이렇게 ‘일방향적으로’ 발전해왔느냐는 점이다. 두번째는 이러한 과정이 일종의 ‘발전된’ 형태라고 간주할 수 있겠느냐는 점이다. 정당 조직이 일련의 ‘발전’ 과정을 겪었다면 한국 역시 그러한 정당 발전의 형태를 취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가장 현대적인’ 정당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보다 적합한 해법일 것이다. 쉽게 말해 만약 서구 유럽에서 카르텔 정당이 보다 ‘현대적인’ 정당 조직 형태라면 한국에서도 그러한 형태를 취하거나 적어도 그러한 형태를 가지기 위한 이전 발전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이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강원택 교수는 정당 조직상의 문제를 바라볼 때 일방향적인 발전과정으로 정당 조직을 간주하는 주장의 이면에는, 뒤에 나타난 조직 형태가 앞선 조직의 형태를 대체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숨어있다고 말한다. 대중정당이 앞선 간부정당을 대체한다거나, 포괄정당이 대중정당을 대체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가지는 맹점은 조직의 형태가 각 정당이 취하고 있는 이념적 기반과 지지 기반, 그리고 형성 과정을 통해 다르게 변화한다는 점을 간과한다. 가령 캐나다의 경우 자유당(Liberals)이나 과거의 진보보수당(Progressive Conservertives)는 전형적인 간부정당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상이한 조직 형태들 간에 공존이 분명히 가능하고, 그것이 현실이다. 한 국가의 정당이 발전하는 경로는 상이하고 또 정당체계 안에서 상이한 조직형태는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한 편, 정당의 조직 형태 역시 한 방향으로 발전해왔다고 보기도 어렵다. 쿨(Koole, 1994)은 네덜란드의 정당 조직을 분석하면서 이를 ‘현대적 간부정당(modern cadre party)’이라고 칭했다.[각주:1] 그의 주장에 따르면 네덜란드 정당은 대중정당의 속성에서 간부정당적인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 네덜란드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당 조직의 변화가 단순히 일방향으로 이뤄졌다고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또 하나의 주장, 즉 뒤에 나온 조직 형태가 앞선 조직 형태보다 보다 ‘발전된’ 형태라는 주장을 보자. 최장집 교수는 “서유럽 민주주의 역사에서 민주화를 위한 모든 투쟁은 1인 1표라는 보통선거권의 확대를 실현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으며, 그것은 노동자계급 정당이라는 대중정당의 출현으로 나타났다”(최장집 2007, 127)고 주장하며 폐쇄적 정당체제의 개혁 방안으로 대중정당의 건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최장집 교수의 주장은 곧바로 반론에 부딪혔는데, 첫째는 대중정당의 시대적 적합성에 대한 의문이고 둘째는 대중정당의 조직형태로서의 적실성에 대한 비판이다. 비판자들은 대중정당이 “19세기~20세기 초 계급적, 이념적 기반을 갖는 유럽 정당 모델에 근거하고 있”다고도 하고(주인석 2009, 23), 입법부의 자율성과 정책역량 강화가 필수적인 대통령제 하에서 중앙집중화된 구조와 강한 기율을 갖는 정당 조직 형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도 비판한다(정진민 2008, 199-232).[각주:2]


이런 논쟁들은 매우 “흥미롭고 유익”하지만 이러한 논쟁들은 “우리 정당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한 이상적 모델을 서구에서 찾으려”는 시도이면서, “정당 조직이 후진적 형태로부터 발전된 형태로 ‘진보’해온 것이라는 전제” 위에 서있으므로 “우리나라 정당정치의 고유성에 대한 고민도 함께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강원택 교수는 주장한다. 정당조직이 발전해온 다원적 경로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지, 어느 하나의 형태가 다른 것을 ‘대체’하거나 ‘발전’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 강원택 교수의 주장이다.


정당 문제를 바라보는 방법에 관하여: 두 가지 도전


한국의 정당을 어떻게 분류해볼 수 있을까? 한국의 정당은 어떤 정당 형태를 가지고 있나? 정당 연구 자체가 서구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만큼 서구 유럽의 경험과 이론을 모델로 삼아 한국의 경험을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적잖이 있지만, 그 안에서 한국 정당정치만의 고유한 현상이 무엇인지는 파악하려는 노력은 활발히 이뤄지지 못했다. 한국의 경험이 상이하다면 어떤 점에서 서구 유럽과 상이한가? 그 안에서 보편적 속성을 찾을 수 있다면 무엇이 있겠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철저히 답하지 않는다면 한국 정당 정치를 설명하는 데 큰 난점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이 논문은 2009년에 쓰여졌지만, 불행히도 6년이 지난 지금도 이렇다 할 연구진척은 크지 않은 것 같다─물론 여기에는 필자의 역량 부족 역시 한 몫을 할테지만.


강원택 교수는 논문에서 카르텔 정당과 포괄 정당으로 한국 정당을 이해하려는 것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결과적으로 정당이 약화되고 있는 것에 대한 우려를 드러낸다. 포괄정당이나 카르텔 정당 모두 정당의 기능적 약화에 대한 조직적 대응이라 볼 수 있는데, 한국 역시 이러한 전철을 밟고 있다는 것은 정당정치가 약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문제는 “결과로서의 정당 약화보다 그 원인”이라고 강원택 교수는 주장한다.[각주:3]


정당정치를 약화시키는 원인으로 등장하는 문제는 무엇이 있을까? 강원택 교수는 크게 두 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정보화 사회로 인한 참여 방식의 다양성이다. 국가와 시민사회를 매개해주는 정당의 역할 없이 시민이 정부와 직접적으로 연계하는 방식이 보다 보편화되고 있다. 특히 스마트폰의 대량보급과 보편화는 이러한 현상을 촉진하고 있다. 더 이상 정당이 시민사회와 국가를 연결하는 매개체로 기능하기 어려운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두번째는 정당과 시민사회의 조직적-구조적 연계가 취약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정당이 계층적-이념적 기반을 통해 지지자들과의 구조적 연계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점은 오랫동안 지적돼온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시된 정당 개방화 정책은 오히려 여론조사에의 의존도를 강화하면서 정당정치의 기반을 더욱 약화시키고 있다. 이런 구조적 환경 안에서 정당 조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 것이 더욱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정당정치를 강화할 수 있겠는가?


어떤 점에서 보면 문제는 비교적 단순하게 좁혀질 수 있다. 어떻게 정당과 시민사회의 연계를 강화시킬 것인가? 현대 민주주의는 정당민주주의다. 논문이 나온지 6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정당정치를 강화하는 문제는 대단히 어렵다. 최근 민주당에서 ‘정당발전위원회’를 건설하여 정당정치를 강화하기 위한 여러 방안들을 내놓고 있는데, 현재 한국의 정당정치가 처한 구조적 환경들에 대응하여 어떤 발전안을 내놓을까? 정당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고 심지어 정치 그 자체에 대한 불신 역시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요즘, 우리는 정당 정치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해법은 분명치 않다. 다만 경험을 통해 비추어볼 때 정당정치가 약화될수록, 그리고 정당을 통한 대표체계가 약화될수록 상층편향적, 하층배제적 정치가 강화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은 분명한 듯 싶다. 정당을 통해 대표 체계가 약할 때, 참여의 기회와 통로가 ‘운동’이나 시민사회 안에서의 자발적 참여에 초점이 맞춰지게 될 때, 정치 참여의 기회와 비용은 그것을 기꺼이 지불할 능력이 있는 중산층 이상으로 한정되게 된다. 그들이 설령 하층까지 포괄하는 ‘선한’ 대안을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선한 시민들’이 만들어가는 ‘선한 귀족정’의 논리이지 민주주의의 논리는 아니다. 나아가 이렇게 될 경우 의제 역시 중산층 편향적인 경향을 가지게 될 수 밖에 없다. 즉 ‘먹고 살만한’ 능력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주장하는 의제와 가치들을 중심으로 의제가 제시된다는 말이다. 정당 정치의 약화는 달리 말하면 ‘지갑을 열 수 있는 사람들’이 더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고 본다.


비록 오래된 논문이긴 하지만 정당정치의 발전을 위해 우리가 어떤 고민을 어떤 바탕 위에서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논문이다. 독자 여러분들에게 일독을 권하며, 정당 정치에 대한 통찰을 얻어갈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1. 강원택, 한국 정당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 정당 조직 유형을 중심으로, 『한국정당학회보』 8(1), 2009, p.123 [본문으로]
  2. Ibid. pp.123-124 [본문으로]
  3. Ibid. p.133 [본문으로]

2017년 10월 4일에 <리뷰 아카이브>에 투고한 글이다. 원문은 여기서 볼 수 있다.


왜 정치사상을 살펴보는가


얼마 전 독일에서 총선이 치러졌다. 그 결과는 꽤 참혹했는데, 비록 기민당이 승리했지만 동시에 극우파들 역시 14% 이상의 득표를 올리며 선전했다. 어딜 가든 극단적인 열정들은 10% 내외를 향유하게 마련이지만 극우정당이 의회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는 ‘유의미한’ 대항세력으로 등장했다는 것은 정치에 있어 심각한 위기라고 볼 수 있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까? 무엇이 극우정당을 성장케 했을까? 예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경제적 문제, 즉 먹고 사는 문제는 한 사회를 뒤흔드는 중요한 균열이다. 독일 총선에 대한 여러가지 분석이 쏟아져나오고 있지만, 그 중 가장 유력한 것은 아무래도 경제적 불평등 문제이다. 경제적 빈곤과 불평등이 반발심을 불러오고 그것이 극우정당을 성장케 한 주요 동력이었다는 말이다.


한국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경제 민주화 담론이 등장한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정부의 정책적 실패로 인해 가속화된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제민주화’에 대한 담론은 오랫동안 진척되어 왔다. 멀게는 해방 전후, 가깝게는 지난 16, 17대 대선에서도 경제민주화는 화두였다. 특이할 만한 점은 ‘경제민주화’라는 용어가 단지 소득 불평등의 개선이나 복지정책을 둘러싼 갈등을 두고 특정하게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경제민주화’라는 용어를 통해 형성되어온 한국의 불평등과 양극화 문제에 대한 해법은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민주화 담론을 해석하는 방식은 대단히 제한적이고 좁다. 종종 경제민주화는 정책적 기술의 문제라거나 혹은 법적 해석의 문제로 치환되어 이해되어 왔다. 혹은 대립하는 주장들을 단순히 나열하거나 혹은 경제적 비용과 효용을 계산하는 수학적 문제로 접근되기도 하였다. 이런 방식의 접근은 경제민주화에 대한 지나치게 좁은 해석을 낳을 뿐만 아니라, 경제민주화가 만들어온 담론의 이념적 지형과 기반을 구체적으로 보지 못하게 한다. 경제민주화를 둘러싸고 대립이 벌어진다는 말은, 단지 경제적 효용이나 법리적 해석을 두고 학자들 간에 벌이는 논리싸움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그만큼 이념적 대립구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질문은 매우 간단하다. 경제민주화는 어떤 정치사상적 함의를 가지고 있는가?


이번에 살펴볼 논문은 권도혁, 강정인 교수「경제민주화 담론에 대한 정치사상적 고찰」(한국정치학회보 51(1), 2017, 5-27)로써 경제민주화 담론이 가지고 있는 정치사상적 함의를 살펴보려 한다. 비교적 최근에 제출된 논문이고, 경제 민주화에 대한 이해를 진척시킴에 있어 본 논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 가지 대립구도: 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 공화주의


경제 민주화 담론을 둘러싸고 어떤 이념들이 대립하는가?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을 듯 하다. 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 공화주의가 그것이다. 한국에서 세 가지 갈래의 논쟁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한국경제연구원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파는 경제민주화를 쓸모 없는 것 내지 불필요한 것으로 취급하며 ‘실패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시장과 민주주의는 전혀 다른 원리로 작동하는 공간이다. 시장은 개인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공간이지만, 민주주의는 강제성의 원칙이 작동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민경국, 배진영 등의 논자들에 의해 제시되는 경제민주화는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모델로 하지만 이 때 경제민주화란 국가가 시장을 통제하는 모델로 이해된다. 요컨대,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부당하고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이들의 주장을 로크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 로크는 자신의 저서 『통치론』에서, 자연상태의 인간이 “자신의 소유물과 인신을 처분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Locke, 1996, 11)를 누리고 있는데, 인간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권위체가 없기 때문에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로크는 “자연적 권력을 포기하고, 공동체가 제정한 법에 따라 모든 사건에 관해서 그 보호를 호소할 수 있는 공동체의 수중에 그 권력을 양도”하는 정치사회가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정치권력이란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두번째는 장하준과 정승일, 그리고 이병천을 중심으로 한 사회민주주의파다. 이들은 한국의 문제점을 고용불안과 복지의 미비로 꼽으면서 이것을 해소할 대안으로 경제민주화를 제시한다. 이들은 각각 재벌을 긍정적으로 활용하자는 입장과 재벌을 극복해야 한다는 입장차로 나뉘지만 기본적인 입장은 보편적 복지를 확층하자는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보편적 복지는 잔여적 복지(residual welfare)의 반대말로써 주로 북유럽 국가의 복지체제를 말한다.[각주:1]


이들은 공공영역이 시장을 통제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시장통제의 열쇠가 ‘사회적 타협’에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실제로 스웨덴 등지가 노조와 기업가 측의 ‘대타협’으로 복지를 이루어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장하준과 정승일은 기업들의 운영원리에 민주적 원칙을 적용하기보다는 기업의 운영원칙은 존중하자는 입장인데, 외국자본에 종속될 우려 때문이다. 외국자본이 한국의 자본을 좌지우지하게 되면 국민경제에 좋지 않다는 것이다. 요컨대 장하준과 정승일은 보편적 복지를 우선하되 기업의 운영원리에 민주주의적 원칙이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병천은 장하준, 정승일과는 다르게 재벌의 운영원리 역시 민주적 책임 규율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각주:2] 요컨대, “재벌의 소유, 지배 구조를 사회적 책임 기업형태”로의 개혁이 바로 경제민주화의 핵심인데, 이 때 단지 주주만이 기업 경영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납품업자를 포함해 이해관계가 있는 모든 사람들이 참여권을 보장받는 형태가 이병천이 주장하는 바로 경제민주화라 할 수 있다.


사회민주주의론의 역사는 어디서 발원했다고 할 수 있을까? 사회민주주의의 기원은 마르크스주의의 수정주의적 해석에서 출발한다. 19세기 프랑스 사회당의 대표적인 수정주의자였던 장 조레스(Jean Jaures)는 사회주의란 노동자계급이 “민주주의와 보통 선거의 법 아래 자신의 세력을 체계적, 합법적으로 조직함으로써 권력에 도달”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민족국가 단위가 확립되기 시작하면서 조레스는 “민족과 조국이라는 것이 하나의 사실”이라고 선언하는데, 수정주의가 발달하게 된 배경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외국자본을 경계하는 장하준과 정승일의 주장은 사민주의적 발상이라 부를 수 있다. 


한 편 사회민주주의의 또다른 기원은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정치가였던 비그포르스(Ernst Wigforss)로부터도 찾을 수 있는데, 그는 생산수단을 독과점하고 있는 대기업들을 민주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유주 없는 사회적 기업’이라는 개념이 그가 제시한 대안인데, 그것은 경영자, 노동자, 정부 관료, 소비자, 지역 대표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다.[각주:3] 이러한 이론은 이병천의 생각과 맞닿아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마지막은 공화주의인데, 김종인과 문재인의 경제민주화 개념이라 말할 수 있겠다. 먼저 김종인은 자유로운 시장경제에 대한 믿음을 의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각주:4] 그는 “한 나라의 경제와 사회가 시장경제의 원리로만 발전하는 것은 아니”라고 못 박는다(김종인, 2012, 32). 그에게 경제민주화란 “어느 특정 경제세력이 나라를 지배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김종인, 2012, 41). 다시 말해 국가 내의 사회세력의 균형과 조화가 경제민주화의 핵심이다. 문재인 역시 이와 같은 사상을 공유하고 있다. 문재인은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이 경제의 다양한 부문을 “획일화”시키고 “독점”하여 한국 경제 전반의 성장 잠재력과 창조성, 다양성을 악화시킨다고 말한다(문재인, 2012, 122).[각주:5]


견제와 균형의 원리는 정치권력의 남용을 억제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원칙을 경제 영역에 적용하는 것이 김종인과 문재인의 경제민주화다. 이러한 견제와 균형의 원리는 공화주의의 원칙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공화주의란 무엇인가? 서구 정치 사상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공화주의의 한 모습은 혼합정부라고 말할 수 있겠다. 혼합정부란 과도한 대중주의의 경향을 막고, 과도한 귀족주의 역시 경계하고자 했던 사상이다. 달리 말해 공동체 내 사회 세력들의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 공화주의의 목표라 할 수 있겠다. 대표적으로 마키아벨리를 들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이 각각의 순수한 정치체로서는 오래 갈 수 없고 다만 좋은 점들이 혼합될 때 건설적인 정부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예컨대 로마 공화정이 대표적이다. 로마는 처음에는 왕국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집정관과 원로원을 설치함으로써 군주정과 귀족정의 요소를 포괄했고 더 후에는 호민관을 선출함으로써 민주정의 요소까지 포괄하여 “완벽한 국가를 유지했다”(Machiavelli 2003, 78-84).[각주:6]


마키아벨리는 각각의 요소에 포함되는 모든 구성원들의 야망을 긍정하고 있지만 동시에 궁극적으로 공공선에 부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키아벨리는 파벌을 “자기이익만 추구하는 자들”로 규정함으로써 이러한 파벌이 공동체 전체의 자유로운 이익추구를 방해한다고 경계한다. 따라서 마키아벨리에게 중요한 것은 갈등적인 세력 간의 견제와 균형이 중요하다. 김종인이나 문재인이 특정 경제세력이 경제를 독점하고 있는 현상을 경계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공화주의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한국에서는 어떤 가치들이 격돌하고 있나


지면의 문제로 말미암아 각각의 사상들이 가지는 구체적인 함의들과 각 논자들의 주장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서술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명백히 경제민주화를 둘러싸고 세 가지 이념적 대립 구도가 있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최근에는 경제민주화의 한 방편으로 ‘기본소득’ 의제가 제시되고 있는 것 같다.


어떤 것이 더 당위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 싶다. 다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실업률와 빈곤이 중요한 화두라는 점은 강조해야 할 것 같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기본적인 키포인트로서 경제민주화에 대한 논의는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경제민주화는 실패했다거나, 경제민주화가 쓸모 없다는 일체의 주장들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어쨌건 중요한 것은 경제민주화에 대한 논의들이 이념적 기반 위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념 대립은 이제 사라졌다는 주장을 종종 보곤 하는데, 경제민주화를 중심으로 한 이념 대립은 여전히 남아있다. 많은 종류의 인간 갈등 중 경제를 둘러싼 갈등이야말로 가장 길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먹고 사는 것에 관한 문제만큼 인간에게 가장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념대립들이 보다 분명해지고 표면적으로 드러날 필요가 있다는 점이겠다.


  1. 권도혁, 강정인, 경제민주화 담론에 대한 정치사상적 고찰, 『한국정치학회보』 51(1), p.12 [본문으로]
  2. Ibid. p.15 [본문으로]
  3. Ibid. p.17 [본문으로]
  4. Ibid. p.18 [본문으로]
  5. Ibid. p.19 [본문으로]
  6. Ibid. p.20 [본문으로]

2017년 9월 29일 <리뷰 아카이브>에 투고한 글이다. 원문은 여기서 볼 수 있다.


들어가며: 자유주의자 홉스? 전체주의자 홉스?


‘토마스 홉스’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이 이름을 익숙하게 들어본 사람들이라면 아마 전제왕권을 떠올리거나 혹은 표지에 드러나 있는 절대왕권을 가진 ‘리바이어던(괴물)’을 생각할 것이다. 홉스의 정치사상에 대한 교과서적 설명을 살펴보면 이렇다. 자연상태에서의 인간은 그 자신의 이기심과 자기보존 욕구로 말미암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War of all against all)’ 상태로 돌입하게 되며 이것이 가져올 파괴적 효과를 방지하고 더욱 효과적인 자기 보존을 위해 주권을 위임하는 방식으로서 절대적 권력을 가진 ‘리바이어던’을 세운다. 리바이어던은 위임받은 주권을 통해 절대적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국가의 안정을 추구하는 행위자로 그려진다. 리바이어던은 종종 ‘절대군주제’의 한 변형처럼 이해되는데 이 때문에 홉스의 사상은 정치사상사에서 절대왕정을 옹호한 사람으로 그려지곤 한다. 반면 홉스의 주장과 논리를 두고 그가 자유주의 정치학의 시초를 열었다고 평가하는 논자도 있다.


이번에 살펴볼 논문은 김태진 교수「홉스 정치 사상에서의 ‘신체’의 문제: ‘신체’(body)와 ‘인격’(person) 사이의 아포리아」(한국정치학회보 51(1), 2017.3, 29-47)로써, 홉스의 주요 저서에서 언급되는 ‘신체’의 문제를 바탕으로 홉스가 그려낸 국가의 형태와 기능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홉스의 사상이 지성사에서─다분히 자유주의적인─근대적 전환을 이뤄낸 지점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필자의 생각을 잠시만 밝혀두자면, 홉스는 단순히 전제왕권을 옹호한 인물로 그려질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 사상의 기초적 흐름을 닦아놓았다고 평가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지 않을까 한다. 홉스의 사상이 가지는 의의는 단지 그의 결말로부터 이끌어낼 것이 아니라 그가 전반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논리의 구조에서 이끌어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그런 점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고찰점을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리바이어던 표지의 의미


홉스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표현 방식이 ‘은유’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의 저작은 은유를 빼놓고는 이해할 수 없다. 그의 주요 저서인 『리바이어던』의 표지만 보더라도 은유적으로 그의 사상이 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리바이어던의 표지를 보면, 머리에는 왕관을 쓰고 한 손에는 칼을, 다른 한 손에는 주교가 쓰는 지팡이인 목장을 들고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거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그 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지상에 더 힘 센 사람이 없으니 누가 그와 겨루랴(Non est potestas Super Terram quae Comparetus ei). 욥기 41장 24절.”[각주:1]


Figure 1 리바이어던 표지


무력을 상징하는 칼과 교회권력을 상징하는 목장을 들고 있음으로써 리바이어던은 정치권력과 교회권력을 한손에 모두 쥐고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그려지는데, 그 아래 제시된 그림들 역시 이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성과 교회, 왕관과 교황모자 그 아래에 왕권을 의미하는 대포와 교황권을 의미하는 파면권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는 총칼과 논리라는 무기가 그려져 있으며, 전쟁터와 종교재판이 그 아래에 그려져 있다.[각주:2] 은유가 사람을 현혹시키기 때문에 거부했다던 홉스가 왜 표지 그림을 은유적으로 사용했을까?


홉스는 국가를 설명하기 위해 신체의 비유를 사용하는데, 이는 당대의 전통적 표현방법들을 답습하고 있지만 동시에 이를 뒤집어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Attie, 2008, 501). 중세 당시의 신체 유비 방법이 어떤 형태를 취했는지는 필자로서는 읽어본 바가 없기에 말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적어도 홉스의 신체 유비법이 단순한 ‘조화로운’ 신체로서의 국가가 아니라 ‘단일한 의지’를 가진 국가를 상정하고 있다는 점은 쉽게 유추 가능할 것이다. 요컨대, 홉스의 유비법은 신으로부터 유도되는 목적론적 조화가 아니라 ‘이성’과 ‘자연법’에 근거하는 ‘기계적인’ 것이다.[각주:3] 그렇다면 질문은 다음으로 넘어간다. 홉스의 기계론적 신체관은 어떻게 탄생한 것인가?


정치적 기계


홉스는 『리바이어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자연은 하느님이 세계를 창조하여 다스리는 기예(Art)이다. 다른 많은 일들에서 그렇게 하듯이 이 자연을 인간의 기예로 모방하면,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의 ‘인공동물(Artificial Animal)’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생명은 신체나 사지의 운동을 말하고, 이 운동은 내부의 ‘중심부분’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안다면, 모든 자동장치들(Automata)(시계처럼 태엽이나 톱니바퀴로 움직이는 기계장치들)은 하나의 인공적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심장’(Heart)에 해당하는 것이 태엽 (Spring)이요, ‘신경’(Nerves)에 해당하는 것이 여러 가닥의 줄(Strings)이요, ‘관절’(Joynts)에 해당하는 것이 톱니바퀴(Wheels)이니, 이것들이 곧 제작자가 의도한 바 대로 전신에 운동(motion)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기예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의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탁월한 작품인 인간을 모방하기에까지 이른다. 즉, 기예에 의해 코먼웰스(Commonwealth) 혹은 국가, 라틴어로는 키비타스 (civitas)라고 불리는 저 위대한 리바이어던이 창조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공인간(Artificiall Man)’이다”(Hobbes 1996, 9). [각주:4]


홉스는 리바이어던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의 신체와 유비하고 있는데, 여기서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말하고자 했던 바는 강력한 주권자를 내세움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표지 제목(『리바이어던, 교회국가 및 시민국가의 재료와 형태 및 권력(LEVIATHAN or the Matter, Forme and Power of A Commonwealth Ecclesiasticall and Civil)』)에서 드러나듯이 인공인간의 ‘재료’는 무엇이고 ‘제조자’는 누구이며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설명코자 했던 점이 드러난다.


홉스가 기계론적 세계관을 가졌다는 점은 어디에서 드러나는가? 사실 『리바이어던』은 홉스의 기계론적 운동론을 적용한 삼부작인 『물체론』, 『인간론』, 『시민론』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작품이다. 즉 자연적 신체(natural body), 인간 신체(human body), 인공적 신체(artificial body)에 대한 연속작품으로서 『리바이어던』이 나온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신체론을 정치학적 원리로서 국가론에 연결시키려 했다. 왜냐하면 인간의 신체는 ‘자연적 신체’임과 동시에 ‘정치적 신체’(body politic)이기 때문이다(Hobbes, 2009, 25-26).


홉스는 신체를 하나의 기계장치처럼 이해했다. 즉 각각의 신체는 ‘조화’를 통해 통일되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기계장치처럼 분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분해-결합의 방법론은 홉스의 사상을 위험한 것으로 만드는 주요한 원인이었다. 절대적 권력을 갖는 군주에 대한 이론이 당대에 없지는 않았지만, 홉스가 사용한 분해-결합의 방법론은 다른 이론들과는 결을 완전히 달리 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홉스의 사상은 중세적 원리로부터 탈피하여 분해-결합의 기계론적 신체론을 국가에 적용함으로써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어냈다.


기계가 가지는 특성은 자동성이다. 그것은 개인의 지배가 아닌 시스템의 지배를 의미한다. 권력의 작동과 원천을 특정한 사람의 신성성이가 귀족적 계급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 시스템의 문제로 이해함으로써 홉스는 국가의 영속성을 이론화하려 했다. 자연적 조화라던가, 혹은 누군가의 독단적 지배를 홉스는 거부했다. 다만 그는 인민의 단일한 의지로서 국가 그 자체가 움직인다는 원리를 설명하려 했다. 『리바이어던』 표지에서 드러나듯이, 거인을 이루는 것은 인민들이다. 인민은 국가를 움직이는 단일한 의지를 상징한다. 다시 말해, 홉스는 인민의 단일한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자동적 기계’로서의 국가를 상상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홉스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진리와 진리가 충동할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진리가 무엇인지 결정해줄 수 있는 ‘권위’가 필요하다. 권위(authority)라는 말은, 저자(author)가 대리인(actor)에게 부여한 것이다. 권위를 부여받은 대리인은 저자가 되어 권위를 휘두를 수 있다. 홉스에게 중요한 것은 절대적 진리나 절대적 진리를 관장하는 특출한 개인의 지배가 아니었다. 다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충돌 상황이 만들어낸 아비규환을 중재할 수 있는 ‘권위’를 구성해내는 작업이었다. “진리가 아니라 권위가 법을 만든다”라는 명제는 여기서 탄생한다.[각주:5]


홉스에게 근대 국가의 모습은 양도를 통해 구성되는 주권자로 표상된다. 그는 일종의 대리인이다. 대리인으로써 그는 인민의 단일한 의지를 나타낸다. 따라서 정치적 신체를 움직이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동력은 군주가 가지고 있는 본래적인 힘이 아니라 국가가 그 자체로 움직이는 원리에 의한 것이다. 나아가 이를 설명하기 위한 방법론이 바로 기계론적 세계관, 즉 분해-결합의 방법론인 것이다.


기계적 운동에 의한 국가는 더 이상 영혼이나 초월적 존재에 의해 지배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운동과 물질에 의해 지배 받는다. 그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하나의 신체구조로서의 국가를 상정하고 그것을 통제하기 위한 단일한 의지로서의 ‘리바이어던’을 내세웠지만, 이제 그것을 구동시키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인민의 ‘단일한 의지’에 의해 리바이어던이 세워지고 국가가 구성되었지만 이제 국가는 어떻게 인격을 부여받을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남아 있다. 단일 의지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나아가 인민이 계약을 통해 구성한 국가는 어떻게 대표될 수 있는가? 그 형태는 반드시 군주여야만 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분명치 않다. 다만 홉스의 사상이 남겨놓은 족적은 단순히 그를 왕당파로 규정할 수 없다는 시사점을 남긴다. 그는 기계론적 방법론을 이용하여 국가를 분해-결합될 수 있는 하나의 자동적-정치적 신체로 만들어놓았고 이것은 분명하게 근대 정치사상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가 목표한 것이 특정한 목적론에 의거한 조화로운 세계가 아닌, 자동적 장치로서의 국가 안에서 국가를 움직이는 힘을 위임받은 존재로서 주권자를 그리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홉스를 완전하게 자유주의자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전체주의자로 만들어버리는 것 역시 너무 가혹한 평가가 아닌가 싶다. 그가 말하는 리바이어던은, 리바이어던이 가져야 하는 강력한 권력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리바이어던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무엇으로’ 구성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홉스의 정치사상을 ‘신체’라는 측면, 특히 ‘정치적 신체’로서의 국가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길 원하는 독자라면 본 논문이 꽤 흥미로울 것이라 생각한다.


  1. 『리바이어던』 표지; 김태진, 홉스의 정치사상에서 ‘신체’의 문제: ‘신체’(body)와 ‘인격’(person) 사이의 아포리아, 한국정치학회보 51(1), 2017, p.30 [본문으로]
  2. Ibid. p.30 [본문으로]
  3. Ibid, p.30 [본문으로]
  4. Ibid. p.31에서 발췌 [본문으로]
  5. Ibid. p.38 참조 [본문으로]

2017년 7월 28일에 <리뷰 아카이브>에 투고한 글이다. 원문은 여기서 볼 수 있다.


들어가며


분배정의에 관한 오랜 논의가 이어져 오고 있지만 정작 한국에서 분배정의에 대한 구체적인 담론은 아직까지도 선별적 vs 보편적 대립 구도로 나뉘어 진행되고 있다. 분배정의에 관한 철학적 담론들이 유수하게 쏟아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들은 ‘이론’으로서만 다루어질 뿐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실행할만한 지침으로서는 아직도 답보 상태라고 말할 수 있겠다. 오히려 그간의 정책들 면면을 살펴보면 분배정의를 실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기까지 했다. 더러는 그것은 공허한 이론으로 취급받으며 조롱마저 당하는 듯 하다.


철학은 정말 이 시대에 기여할 수 없을까? 특히, 정치에서 철학은 어떻게 기여할 수 있나? 이번에 살펴볼 논문은 정진화 교수「존 롤즈(John Rawls)의 분배정의론과 한국적 적용에 대한 연구」(한국정치학회보 50(2), 2016.6. 75-101)로써 존 롤즈가 주창했던 정의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한국에 어떻게 분배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살펴보려 한다.


정치는 구체적인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철학은 때로는 현실과 유리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철학 없이 정치를 한다는 것은 되는대로 정치를 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철학이 정치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을 찾고자 했고 또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어왔다. 정치는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철학이 그것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가 나의 관심사 중 하나라고 하겠다. 필자와 유사한 문제의식을 가진 독자라면 아마 본 논문이 꽤 흥미롭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정치의 역할


분배정의를 어떻게 현실적으로 적용할 수 있겠느냐는 논의를 이루어가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따져보아야 할 것이 있다. ‘정치’의 역할에 대한 고찰이 그것이다. 정치학도인 필자 입장에서야 ‘정치’ 그 자체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일테지만, 동시에 정치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일 역시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가장 고전적이고 유명한 정의를 따라가보면, 정치는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Authoritative Allocation of Social Values)’으로 정의된다(D. Easton 1953). 권위있는 정치학자 중 한 사람인 해럴드 라스웰(Harold Lasswell)은 희소한 자원으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권력이 분배에 관여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정치를 권력투쟁의 장으로 보았다. 이 때 권력이란 특정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특정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것을 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다.


이외에도 여러가지 정의들이 있지만 대체로 정치에 대한 정의들을 살펴보면 ‘분배’ 내지 ‘조정’, 그리고 그를 위한 ‘권력’의 획득과 그 행사로 요약 가능하다. 요컨대, 정치는 분배에 있어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제한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공정하게 분배함으로써 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인 셈이다(과연 이러한 정의가 충분한지에 대해서는 일단 대답을 유보하자). 그렇다면 질문은 다음으로 넘어간다.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무지의 베일과 분배정의의 원칙


“사회가 정의롭다고 하는 것에 대한 질문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예를 들면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분배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이러한 재화들을 올바른 방식으로 분배하며 개인에게 합당한 몫을 나누어준다. 하지만 누가, 왜 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묻기 시작할 때 어려움이 시작된다”(Sandel 2009, 19).


존 롤즈의 논의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롤즈가 무엇을 규명하고자 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롤즈는 “정의에 대한 개념이 갖는 뚜렷한 역할은 기본적 권리와 의무를 구체화하고 적절한 분배의 몫을 결정하는 것”(p.78)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적절한 분배의 몫을 결정할 것이냐는 것이겠다.


롤즈의 정의론의 핵심은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로 요약될 수 있다. 이 때 무지의 베일이란 모든 사람이 평등한 최초의 상황에 놓이게 되는 가상적 장치로서,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을 가능케 하는 제한조건이다. 이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위치나 사회적 지위, 경제적 지위, 권력, 명성, 지능, 신체적 능력 등이 어떠한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원칙을 설계할 수 없으므로 이 때 세워진 정의의 원칙들은 공정하다고 간주할 수 있다.[각주:1]


롤즈는 원초적 입장에 놓인 사람들이 선택할 원칙은 다음과 같다고 말하였다.


첫 번째 원칙: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유사한 자유체계와 양립하는 가장 광범위하고 동등한 기본적 자유체계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두 번째 원칙: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다음 두 가지 경우.

a. 정의의 저축 원칙과 일치하여 최소수혜자들에게 최대 이익이 될 때

b. 공정한 기회균등 조건 하에 모두에게 직책 및 직위가 개방되어 있는 것과 결부될 때 편성될 수 있다(Rawls 1999, 266)


첫번째 원칙은 이른 바 ‘자유의 원칙’이라 불리는 것으로서 모든 사람이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를 누리고 향유하는 데 있어 평등함을 강조하는 원칙이다. 두 번째 원칙은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에 관한 원칙’으로서 분배정의와 관련된 항목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a)의 경우 최소수혜자들의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것으로서 이른 바 ‘차등의 원칙’으로 불리며, (b)의 경우 모든 사람들에게 직위와 직책이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서 ‘공정한 기회 균등의 원칙’이라고 불린다. 이것이 롤즈의 정의론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무지의 베일


롤즈의 정의론의 핵심이야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익히 들어봤을 내용일 것이다. 이제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현실에서 제도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느냐이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롤즈의 정의론에서 핵심적 명제라 할 수 있는 ‘무지의 베일’은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가상의 상황이며 또 실천 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무지의 베일이 가지는 성격에 대해 박효종(1995)은 ‘두터운 베일’과 ‘얇은 베일’을 구분하여 해석하였다. 이것을 잠시 소개하자면 이렇다. 무지의 베일은 공정성과 공평성을 담보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사회계약 상황에서 완전무결한 만장일치를 보장한다. 만약 무지의 베일이 개인의 구체적 이해관계를 완전히 차단할 수 있다면 그것은 ‘두꺼운’ 것이 될 것이지만 베일이 얇아질수록 구체적 이익으로부터 차단되는 정도가 약하고 공정성 또한 담보하기 어려울 것이다(박효종 1995, 432-434).[각주:2]


현실에서 베일의 두께를 두껍게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면 보다 공정한 의사결정을 위한 원초적 입장을 제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러한 장치를 최대한 구현하는 것은 그것이 없는 것보다 더 높은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롤즈는 원초적 입장에서 제헌위원회가 만들어져 헌법과 사회체제가 결정되는 것이 공정한 규칙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현실의 국가들은 이미 헌법이 제정돼 있고 또한 국가를 이미 형성한 상황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원초적 입장을 적용하기에는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그나마 가장 가까운 상황이라면 헌법 개정 상황일 것이다. 헌법 제정 당시 사회구성원들의 참여와 동의가 부재했던 역사를 들며 논문 저자는 헌법 개정 시 ‘국민숙의위원회(가칭)’와 같은 단계를 마련하고 운용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러한 장치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즉 ‘원초적 입장’을 모의적으로나마 구현하기 위해서는 헌법 개정을 한 가지 상황으로 가정할 경우 “최대한 그 사안에 대해 특정 세력들의 이해관계가 크게 가시화되지 않고 관련 정보들의 노출이 비교적 적은 시기가 바람직할 것”이라고 논문 저자는 주장한다.[각주:3]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분배정의


현대국가는 복지국가를 지향한다. 복지는 현대국가에서 자원을 재분배하는 주요한 정책적 수단이며, 이러한 정책이 얼마나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느냐가 그 국가의 복지 수준을 결정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복지국가 담론은 선별적 vs 보편적 복지 프레임에 머물러 있을 뿐 이것이 진전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복지 담론에 롤즈의 분배정의론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위에서의 고찰이 롤즈의 분배정의론에서 핵심인 ‘무지의 베일’을 구현할 수 있는 모의적 상황에 대한 제안이라면 이번 파트에서는 본격적으로 분배정의 실현에 관한 이야기를 다룰 것이다.


롤즈의 복지 개념은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의 조합으로 이해된다. 그의 두번째 원칙 중 ‘차등의 원칙’은 경제적으로 불리한 최소수혜자들을 대상으로 하며, 그것은 복지의 수혜대상을 한정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선별적 복지 개념과 일치한다. 다른 한편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은 복지 서비스의 대상을 제한하지 않고 경제적 기준으로 서비스 대상자를 구분하지 않으므로 보편적 복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각주:4] 이것을 간단한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정진화(2016)에서 발췌


한 편, 롤즈의 정부조직 구성도에 비례한 한국의 정부 조직 현황은 다음과 같다.


정진화(2016)에서 발췌


한국의 정부조직은 롤즈가 제안한 조직구성과 기능에 부합하는 조직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 논문의 저자는 분배처의 역할을 담당하는 국세청이 4대 권력기관임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조직이 아니라 기재부 산하로 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복지국가가 실현되고 보다 분배정의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분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부처가 힘을 가질 필요가 있다. 논문의 저자는, 따라서, 분배처의 기능을 강화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


정치의 역할에 대한 고찰부터 롤즈의 분배정의가 실제 제도상으로 어떻게 관철될 수 있는지까지, 꽤 길고 두꺼운 이야기들을 다루었는데 본 글에서 논문이 함의하는 바를 충분하게 검토하지 못하는 점은 필자의 역량부족이라 하겠다.


필자의 부족한 생각이지만, 롤즈의 정치철학으로부터 이것을 어떻게 현실과 접목시킬 것인지, 그리고 철학적 논의가 어떻게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를 고민할 때 비로소 더 나은 사회를 향한 길이 열리리라 본다. 기실 이념과 말은 때로는 공허할 수 있지만 현실의 실천은 대단히 구체적이다. 만약 철학적 담론이 단지 강단에서 이루어지는 논리적 우열의 다툼이라면 그것이 현실과 가지는 관계성에 대해 숙고해보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롤즈는 ‘이상적인’ 정치체계를 고안하기 위해 노력했던 철학자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롤즈의 논의는, 현실에서 우리가 어떻게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해 엄중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물론 그것을 실행하는 데 있어 물리적이고 현실적인 한계들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철학을 바탕으로 보다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하는 일을 멈춘다면 어떻게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본 논문은, 필자가 보기에, 롤즈의 논의를 기계적으로 끼워 맞춘 듯한 인상이 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접맥될 수 있는 철학의 가능성을 탐색하려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읽어보시길 권한다.



  1. 이러한 원초적 입장에 대한 여러 비판 중 대표적인 것은 샌델의 비판인데, 샌델은 롤즈의 원초적 입장이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상황이며 실제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래야만 한다’라는 의무론적 주장이라고 비판하였다(정진화 2016.6. 79-80) [본문으로]
  2.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 리뷰가 소개하는 논문 p.86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3. P.89 참조 [본문으로]
  4. P.88 참조 [본문으로]

2017년 7월 28일 <리뷰 아카이브>에 투고한 글이다. 원문은 여기서 볼 수 있다.


전 세계 법치주의 지수(2005). 녹색에 가까울수록 법치주의를 높게 실현하고, 적색에 가까울수록 그러하지 아니하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서론


구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는 민주주의로의 이행기를 겪는 듯 하다가 푸틴의 집권으로 인해 오늘날에는 거의 공고한 권위주의 국가로 받아들여진다. 이들은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실행에 옮기는 데 있어 무엇 때문에 실패하였는가? 민주주의를 공고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바꿔 질문하면, 무엇 때문에 러시아는 권위주의로 퇴행하였는가.


오늘날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평등을 한 축으로 하고, 그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고 또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서의 ‘법의 지배’를 또다른 한 축으로 해야만 한다. 법의 지배가 곧 민주주의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법의 지배 없는 민주주의는 상상하기 어렵다. 정치적 평등을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 체제라 할지라도 규율과 규칙은 필수적으로 필요하며 또 그러한 규칙에 복종하는 시민이 있어야만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법의 지배(rule of law)’란 법 그 자체의 신성성과 불변성, 혹은 절대성 따위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의 행사를 위한 요건과 근거들을 마련하고 그럼으로써 권력이 효과적이고 공정하게 집행되도록 강제하기 위한 장치이다. 법의 지배는 달리 말하면 ‘지배(rule)’의 편의성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국가권력의 전횡과 독단을 방지하고 시민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근대국가의 견제장치라고 말할 수 있겠다.


본 고에서 살펴볼 논문은 이선우 교수「민주주의 공고화에 있어 ‘법의 지배’의 우선성: 탈공산 러시아의 사례」(한국정치학회보 51(1), 2017.3, 49-72)로써, 탈공산 러시아의 사례를 통해 민주주의가 공고화되기 위해 법의 지배가 왜 필요한지를 고찰하고, 또 그를 통해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 사이의 관계를 면밀하게 들여다보려 한다.


법의 지배와 민주주의


법의 지배와 민주주의 사이의 관계는 대단히 미묘해서, 양자는 ‘정치의 사법화(judicialization of politics)’, ‘사법의 정치화(politicization of justice)’라 불리는 현상을 야기하며 종종 충돌하곤 한다. 종종 법의 지배는 민주주의의 수호신을 묘사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민주주의적 가치들을 훼손하기도 한다.


‘법’은 지배할 수 없다. 법은 종이 위에 쓰여진 글자에 불과하며 글자가 인간을 지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지배하는 것은 그것을 해석하는 ‘인간’이다. 쉐보르스키(2008)는 ‘법의 지배’라는 용어를 두고 “사실에 대한 기술로서도 설득력이 없으며, 더욱이 설명이라고 보기도 어렵다”라고 말한다.[각주:1] 물론 이에 비판하는 이들도 역시 있기는 하나, ‘법의 지배’ 개념은 여전히 논쟁적인 개념 중 하나라고만 요약해두도록 하자.


그렇다면 법은 실제로 공정한가? ‘법’은 실제로 공정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철저히 ‘계급적’이며, 수많은 권력이 개입하는 공간이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였던 트라시마코스가 지적하듯, “법은 강자의 도구”이며, 나아가 그것은 사회 세력 간의 힘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회세력 간의 힘의 균형이 이루어져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법이 유용한 것으로 인식될 때, 비로소 제도적 균형이 이루어지며 법의 지배가 실현된다.[각주:2]


다른 한편, 현대 민주주의는 대단히 복합적인 구성물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오랜 전통(?)은 정치적 평등 위에 시민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민주주의는 글자 그대로 ‘인민의 지배’를 뜻하지만 사실 이러한 정의는 인민이 어떻게, 왜 지배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단히 공허한 정의이기도 하다. 민주주의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여전히 분분한 논의가 있을 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자들은 민주주의에 대해 통일된 정의를 내리기보다 각 정치체제 사이의 특징을 비교함으로써 귀납적으로 공통된 몇 가지 특질을 찾아냈을 뿐이다(Rose 2009, 12).


민주주의의 정의에 대한 고전적인 논쟁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보자면 최소주의적 정의와 최대강령적 정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쉐보르스키 등(Przeworski et al. 2000)은 사회적 안정이나 경제적 번영 등이 민주주의의 전제로 고려될 때 민주주의에 대한 실질적 추구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의회 및 행정부 수장을 선출하는 정기적인 선거시스템의 존재 유무로서 민주주의로 분류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최소주의적 민주주의, 다시 말해 선거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완성하기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점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권력자가 선거 이외의 기간에 독단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와 유인이 있다면 민주주의는 위협받게 된다. 따라서 민주적 과정들이 안정적으로 지속되기를 바란다면 법의 지배는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의 사례


법의 지배를 먼저 확립한 후에라야 민주주의가 공고화되느냐, 혹은 ‘민주주의의 습관화’를 통해 시민사회를 성장시킴으로서 민주주의를 공고화시킬 수 있느냐,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단선적인 경로가 없다는 답변 밖에는 할 수가 없다. 선거민주주의가 확립되었다고 하더라도 해당 국가가 반드시 자유민주주의로 나아가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이미 정당이 존재하고, 정당 간 경쟁이 존재하며, 또 시민사회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제 3의 민주화 물결 때 민주주의로 나아갔던 신생 민주주의 국가들 중 많은 수가 권위주의로 퇴행한 것은 시민사회나 혹은 정당체계의 미발전이 신생민주주의 국가의 권위주의적 퇴행을 낳은 결정적 요건이 아닐 수 있음을 시사한다.[각주:3]


러시아는 민주주의 국가로 나아가다가 권위주의로 퇴행한 대표적인 사례다. 옐친 대통령 시기(1993-1999) 러시아의 민주주의는 꽤 양호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각주:4] 또한 집권 후반기에는 정당의 발전 가능성 역시 있었고 시민사회 역시 꽤 발전한 상태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논문 저자는 옐친 대통령 시기에 ‘법의 지배’의 원칙이 관철되고 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한다. 일차적으로 헌법과 법률상 대통령이 사법부에 대해 과도한 통제력과 제도적 우위를 점유하기 때문이다. 법의 지배를 이루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사법부의 독립인데, 만약 대통령이 제도적으로 사법부보다 우위를 점한다면 법은 권력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러시아의 경우 사법부를 둘러싼 각각의 이해관계들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또 다원화되어 있었으므로 이것을 일종의 과도기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법의 지배가 확립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항상적으로 권력에 대해 견제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때라야 법의 지배가 확립된 것이지, 만약 지지율이나 임기 등의 변수에 의해 유의한 영향을 받는 상황이라면 법의 지배가 안정적으로 확립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이는, 만일 사법부에 대한 강하 장악력을 가진 권력이 등장할 경우 국가 내 정치적 경쟁을 허물고 정례적 선거마저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각주:5]


결과적으로 푸틴 정부가 출범하면서 허약한 법의 지배는 사실상 무너졌다. 푸틴은 새로운 법을 제정하면서 정당 등록 요건을 대폭 강화하고, 언론과 시민단체들에 대한 재정적, 행정적 검열과 통제를 강화하였다. 또한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 데 사법기관을 적극적으로 동원했고, 통제된 언론들은 급속도로 푸틴에 대해 압도적인 보도 시간을 할애하는 등 불공정한 정치적 경쟁 환경을 조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2007년 12월 치러진 하원 선거에서 집권당인 단합러시아당은 315석을 획득하여 개헌선을 돌파하였고, 이것은 더 이상 러시아의 선거제도가 집권당을 바꿀 수 있는 정치적 경쟁의 장으로 기능하지 않음을 뜻했다.


민주주의에 있어서 법의 지배의 중요성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는 대단히 복잡한 관계이며 어떤 것이 더 우선하느냐를 따지는 것은 사실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논문 저자는 “정당체계와 시민사회가 사법권력의 공정성과 투명성, 책임성을 제도화시킬만큼 발전하지 못한다면 그 국가의 시민적 자유와 권리는 언제든지 위축될 수 있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고 말하며 글을 끝맺고 있다. 결국,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법의 지배를 확립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민주주의를 공고화하는 과정에서도 법의 지배를 확립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권력에 대한 효과적인 견제장치가 없을 때, 권력은 언제든지 자신을 견제하려는 세력에 대해 적대적인 칼날을 세우고 달려들 것이며 또 그것은 많은 경우 좋은 결과보다는 재앙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법의 지배를 두고 단순한 준법 정신이나 법 그 자체를 지켜야만 한다는 의무적 당위성만을 설파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정치체제를 이루는 요소로서의 법의 지배는 시민들의 준법정신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법부가 얼마나 잘 독립되어 있는가, 또 그들이 얼마나 사회적 책임성 하에 노출되어 있는가, 그들이 효과적으로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는 문제이다. 논문 저자는 민주주의로의 이행과 그 공고화에 있어서 정당체계나 시민사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전략을 수정하여 법의 지배를 먼저 확립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전략이 신생민주주의 국가들에게 긍정적일 수 있을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1. 애덤 쉐보르스키(2008), p.47 [본문으로]
  2. Ibid. p.51 [본문으로]
  3. 이선우(2017), pp.55-56 [본문으로]
  4. 프리덤하우스의 평가에서 대부분 3점대를 기록하였다. [본문으로]
  5. 이선우(2017), p.59 [본문으로]

#1


오전 미사에 다녀온 후, 두어시간 남짓 낮잠을 잤다. 아주 잠깐, 꿈을 꾸었다. 나의 장례식이었다. 이전부터 종종 꾸어왔던 꿈인데, 잠에서 깨고 나니 문득 예전에 보았던 기사가 떠올랐다. 젊은 사람들이 자신의 가장 아름다웠던 때를 영정사진으로 남겨놓기 위해 사진관을 찾는다던 기사였다. 조만간, 나 역시 영상으로 된 유서를 하나 남겨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2


그간 몇 편의 유서를 써 놓았었다. 유서를 쓰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나의 죽음에 대한 장송곡을 쓰는 셈인데, 유서를 쓰는 그 시간은 나의 지난 궤적을 톺아보는 시간이었다. 그 동안의 회한과 설움, 후회, 미련, 아쉬움, 슬픔 따위를 적어내다보면 지나간 나의 삶은 초라함 그 자체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는 한다. 돌아보면 바보 같고 미련한 일들만이 기억에 남는다.


#3


지나간 글들은 모두 나의 죽음을 준비하는 글이었다. 2개월 남짓 남은 2018년, 지난 한 해 간 썼던 글들은 모두 죽음과 맞닿아 있었다. 죽음과 삶 사이에는 단지 종이 한 장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내게는 둘이 그다지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4


마음 속 한켠에 자리하던 미련들이 있다. 난 미련하게도 그것들을 쉬이 버리지 못한다. 불가능에 대한 집착. 그래, 집착이란 단어 말고는 설명이 불가하다. 난 항상 불가능한 것들을 사랑했고, 집착했고, 또 실패했다. 그 실패의 늪에서 늘 허우적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상 무언가를 붙들고 있었지. 실패를 예견하면서도.


#5


지나간 글 중, 2017년에 나는 내 스스로에게 약 1년 간의 시한부를 선고했더랬다. 물론 시한부는 이미 지나갔다. 미련 가득했던 바보 같은 지난 시간들에 대한 훌륭한 보상은 죽음 말고는 없을 것이다. 그 한없는 초라함과 '아무것도 아님'에 대해, 다만 나는 슬퍼할 뿐이다.


#6


친한 형은 내게 휴식이 필요하다 했다. 죽음은 영원한 안식이 되겠지. 오늘 하루는 내내, 나는 나의 장례식을 생각했다. 꿈에서 보았던 그것. 나의 장례식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던만큼, 나의 죽음 역시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잠시 잊은 줄 알았던 슬픔들이 밀려와 나를 덮쳤다. 쓸쓸한 죽음이야말로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죽음이다. 잊혀지는 고통이야말로 내게 어울리는 죗값이 될 터이다.


#7


나는 무엇을 사랑해왔을까. 사랑의 기억은 내게 너무나도 낯설다. 그건 마치, 이미 오래 전 부서져 버린 유리조각 같은 것이다. 부서졌지만, 끝끝내 치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이리저리 뒤흔들릴 때마다 그 파편들은 영혼 깊숙히 박혀 상처입힌다. 하여 나는 오래 전부터 부러 사랑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으려 한다.


#8


내가 무엇을 사랑했고 또 사랑해왔는지, 난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사랑이란 단어 자체도 무척 낯선 것이다. 다만 가끔씩, 이따금 불어오는 봄바람 같은 설레임만이 있을 뿐이다. 설레임의 이면은 두려움이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 나는 그 설레임과 두려움의 양 극단의 사이에서 이리저리 흔들릴 뿐이다. 때때로 그것은 비수처럼 날카롭지만, 때로는 안정감을 주는 것.


#9


두려움이 더 컸던 탓일까. 더 이상 상실의 고통을 겪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어쩌면 그것이 지금의 나를 더욱 옹졸하고 조급하게 만들었을지도. 상실된 것들은, 내게서 떠나간 것들은 항상 내가 가닿지 못한다는 사실로부터 슬픔의 변주곡을 연주해왔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내가 사랑해왔고 사랑했던 것들에게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나는 피눈물을 삼켜야 했다. 비참함. 그 말 외에 무엇으로 더 표현할 수 있으랴.


#10


한 동안 넬의 「백색왜성」을 들었다. 잘못돼 버렸어. 부서져 버렸어. 돌아가고 싶어. 그러나 나는 돌아갈 수 없다. 지나간 시간들은 이미 허공으로 흩어졌고, 흩어진 시간만큼 나의 존재 역시 옅어졌을 것이다. 딱 그만큼,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을 것이다. 내 눈물엔 네가 없어. 나의 눈물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다.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11


11월은 위령성월이다. 세상을 떠나간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다. 나는 어디에서 위로받을 수 있을까, 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곧 그만두었다. 나의 안식처란 이곳이든 저곳이든 없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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