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1월 경에 쓴 글이다.

군대에서 보자마자 주저없이 집어들었던 책이다. 그 때 당시 문유석 판사님의 페이스북을 팔로잉하고 있었는데, 한창 핫했던 글 몇 편이 책 속에서 보였다. 몇몇 구절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읽었지만 몇몇 구절은 다소 갸우뚱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문 판사님은 이념의 시대는 끝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른 바 ‘역사의 종언’과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이념의 세계이다. 정치는 이념 없이는 이루어지기 힘들다. 단순히 정책 내용의 좋고 나쁨만 가지고 대결하는 것은 상당히 나이브한 생각이다. 이념의 대립이 만든 비극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지만, 동시에 이념을 잃어버린다면 대중을 조직할 수 없다. 정치는 갈등과 대립 위에서 대중을 동원하고 조직하여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게 획득한 권력의 토대 위에서 다양한 가치들이 분배되고 정책이 집행된다.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면서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느낄 때가 많다. 인간은 결코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 문 판사님 지적처럼 “세상 모든 일에 명쾌한 답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이는 사람들을 마주칠 때마다 나는 그들의 자신감과 오만함이 어디에서 근원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한 조각의 세상을 볼 뿐이다. 그마저 우리들은 다양한 가치관과 이념에 따라 그 한조각의 세상마저 뒤틀어서 보게 마련이다. 그 조각들이 서로 맞물리고 부딪히면서 오해와 대립을 만든다.
인간에 대한 환멸, 냉소, 증오심에 빠지지 않고 인간과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 것. 요즘 내 스스로를 돌아볼 때마다 스스로가 무척 냉소적으로 변했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이런 책을 다시 읽으니 좋다.
p.37
타인과의 비교에 대한 집착이 무한경쟁을 낳는다. 잘나가는 집단의 일원이 되어야 비로소 안도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탈락의 공포에 시달린다. 결국 자존감 결핍으로 인한 집단 의존증은 집단의 뒤에 숨은 무책임한 이기주의와 쉽게 결합한다. 한 개인으로는 위축되어 있으면서도 익명의 가면을 쓰면 뻔뻔스러워지고 무리를 지으면 잔혹해진다. 고도 성장기의 신화가 끝난 저성장 시대, 강자와 약자의 격차는 넘을 수 없게 크고, 약자는 위는 넘볼 수 없으니 어떻게든 무리를 지어 더 약한 자와 구분하려 든다. 가진 것은 이나라 국적 뿐인 이들이 이주민을 멸시하고, 성기 하나가 마지막 자존심인 남성들이 여성을 증오한다.
p.41
글이란 묘해서 어떤 목적이 앞서거나 읽는 이에게 어떻게 보이고 싶은 욕구가 앞서는 듯 보이는 글은 감흥을 주기 어렵다.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 MRI에 ‘뽀샵’을 하고 싶은 욕구가 앞설 때쯤이 글쓰기를 집어치워야 할 시기일 듯 하다.
p.51
결국 우리가 더 불행한 이유인 수직적 가치관을 버리고 수평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다양성의 존중, 아니 그걸 넘어서 다양성을 숭상하는 것이 사회 다수 구성원의 행복을 위한 첩경이다.
p.117
결국 일본이든 우리든 지난 시대의 기준을 들이댄 ‘세대론’으로 현재를 완벽하게 설명하려 드는 건 어리석다. 처한 입장의 차이가 하늘과 땅처럼 다른 다양한 개인들을 ‘세대’라는 카테고리로 묶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까. 이십대를 괴물이 되어버린 세대로 보는 것도, 모든 것에 달관한 세대로 보는 것도 모두 성급하게 느껴진다. 그저 지금 시대상의 한 단면씩만을 잘라서 보는 것은 아닐는지.
p.119
“어떤 사람에게는 눈 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황현산 선생의 글이다.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리 두터운 현재를 갖고 있지는 못하기에 서로 일깨워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 주변의 친밀한 세계와 사회라는 커다란 세계를 연결하는 고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말이다.
p.133
그러나 세상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미국 백인 청년이 ‘슬럼가 흑인이 더럽고 불쾌한 것은 사실 아니냐’라고 개인적 의견을 말하는 것은 인간을 노예로 사냥한 역사와 빈부격차, 불평등이라는 맥락에 대한 무지다. 인간 세상에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가치 중립적인 ‘팩트’란 없다. 그걸 생각한다면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더 심각한 것은 ‘왜 선비인 척 하느냐’는 한마디다. ‘선비’가 모멸적인 세상이다. 위선 떨지 말라는 뜻이다. 속시원한 본능의 배설은 찬양 받고, 이를 경계하는 목소리는 위선과 가식으로 증오받는다. 그러나 본능을 자제하는 것이 문명이다. 저열한 본능을 당당히 내뱉는 위악이 위선보다 나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위선이 싫다며 날 것의 본능에 시민권을 부여하면 어떤 세상이 될까.
p.155
대중의 분노는 즉각적이고 선명한 정의를 요구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법관으로 일해본 경험에 비춰보면 실제 인간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 중 상당수는 인과관계도, 동기도, 선악 구분도 명확하지 않다. 신문기사처럼 몇 문장으로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참으로 많다. 그래서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 달리 냉정한 ‘팩트’ 집합으로 보이는 신문기사보다 주관적인 내면 고백 덩어리로 보이는 문학이 실제 인간이 저지르는 일들을 더 잘 설명해줄 때가 많다.
pp.208-209
이념 문제가 아닌 것을 이념 문제화하는 강박증은 두 가지 점에서 위험하다. 첫째, 실제적으로 필요한 토론과 의사결정을 방해한다. 각 방안의 장단점을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 따지는 머리 아픈 과정을 ‘우리 편의 주장인지 적들의 주장인지’로 광속 대체하는 반지성주의를 낳는다. 둘째, 삼인성호(三人成虎). 몇몇이 떠들어대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진다. 몇몇 소수가 그들만의 리그에서 이념 투쟁을 벌이는 것을 보다보면 마치 이 사회에 진짜 심각한 이념 대립이 있는 것처럼 착시 현상이 생긴다. 거짓 선지자들에게 인류는 속을 만큼 속았다. ‘좌우자판기’를 철거해야 하는 이유다.
pp.211-212
사실 한국사회의 윤리관은 조폭의 의리 수준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폭을 미화하는 영화가 수없이 제작되고, ‘의리’가 유행어가 되며, 전두환에 대한 장세동의 무조건적인 충성이 미담이 되는 사회다. 사람들의 속마음은 내가 나쁜 짓을 해도, 구린 데가 있어도 끝까지 나를 배신하지 않는 공범을 원하는 거다. 세상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있나. 뭐 대단한 정의의 사자랍시고 입바른 소리를 하고 그래. 그러는 너는 얼마나 깨끗한가 보자. 자기도 조직 내에서 혜택받을 건 다 받고 다른 속셈으로 뒤통수를 치는 걸 거야. ‘웃픈’ 것은 대단한 나쁜 짓을 해볼 배짱도 기회도 없는 소시민들이 이런 식으로 가당치도 않게 조직의 보스에 감정이입하고 동정한다는 점이다.
pp.228-229
인간 세상의 문제는 참으로 복잡하여 일도양단에 흑백을 가릴 수 없는 면이 많다. 인터넷을 서핑하다보면, 우리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다들 참 명쾌한 정답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진보, 보수, 좌파, 우파. 결국 우리 편이냐 아니냐가 중요할 뿐, 문제 그 자체가 갖고 있는 다층적인 면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목소리는 오히려 귀한 것 같다. 이런 면도 있고, 저런 면도 있고 이야기하면, “간단히 말해서 누구 잘못이란 말이냐! 너 이런 소리 하는 거 보니까 저쪽이지!”라고 윽박지르는 목소리가 당장 튀어나온다.
pp.233-234
안와르 콩고 같은 지역 폭력 세력은 이념에 따라 움직이는 자들이 아니라(이념을 이해할 최소한의 지성도 없는 자들이다) 권력에 기생하며 돈을 벌고 물욕, 성욕을 충족시키려는 본능에 충실한 사냥개들이다. 이들은 아무 주저 없이 혁명의 기치 아래 우익 세력 수청에도 열정적으로 헌신했을 것이다. (…)
결국 이건 문명과 야만의 문제다. 안와르 콩고를 비롯한 깡패들은 순진무구할 정도로 솔직하다. 그냥 멋대로 욕망을 충족시키는 존재, 그것이 그들 ‘프레만’들이다. 권력자가 돈을 주며 지시하면 아무 고민 없이 이웃들을 떄려죽이고 성욕이 발동하면 열네 살 아이를 강간한다. 극장에서 본 존 웨인 서부영화를 동경하며 존 웨인이 인디언을 학살하는 영웅적인 모습과 자신들을 동일시한다. 그들이 추구하는 자유인, ‘프레만’이란 그냥 동물적 본능대로 사는 수컷 무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들을 비하할 것도 없다. 한국사회에서 ‘의리’ 운운하며 흥행에 성공하는 조폭영화를 보며 멋지다고 열광하는 이들이 감히 누굴 비하한단 말인가.
p.243
쉴새없이 흘러가는 화사한 젊은이들의 물결과 거리공연 예술가들의 밝은 얼굴을 보면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저 청춘의 열기에 들뜬 젊은이들의 물결이 결국은 이 자유로운 사회를 종교적 원리주의로 되돌리려는 시대착오적 시도를 막아낼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세상에는 잠시 멈춰 세울 수는 있어도 돌이킬 수는 없는 커다란 흐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p.261
핀란드인들은 정직성을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중시하여 국민 대부분이 세금을 정직하게 내고 탁월한 자질의 총리가 국회에서 ‘부정확한 용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해임될 정도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말 많음을 불신하고 과묵함을 선호하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핀란드 유머가 재미있다. 핀란드인 두 명이 코냑 열 잔 정도를 침묵 속에서 비우며 백야에 지평선 따라 움직이는 태양을 구경한다. 마침내 한 명이 중얼거렸다. “하늘 멋지군……” 그러자 다른 한 명이 소리를 질렀다. “여기 술 마시러 왔지 종일 수다 떨려고 왔나!”
p.273
우리 사회를 배경으로 상상해보자. 국민 여론의 82퍼센트가 찬성하는 긴급한 조치가 있다. 그것도 국민 생명, 건강에의 위협이라는 심각한 공포를 이유로 한다. 과학계는 근거 없이 사회적 공포를 야기하는 것이라 주장하며 반대한다. 하지만 여전히, 과학자들의 의견이 꼭 백 퍼센트 정확하다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며 국민 여론을 들끓는다. 그리고 다른 모든 사안과 마찬가지로 과학계의 공식 입장과는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하는 학자나 재야 전문가들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근거 없는 음모론이 횡행하기 시작한다. 이 상황에서 여론을 거스르는 결정을 할 책임자가 얼마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