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지난 5월 3일 목요일, 인천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소모임인 '정경학'에서 후배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의 해제문이다. 기초부터 정리해나간다는 생각으로 썼는데, 쓰다 보니 내가 기초가 꽤나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 워드 기준 A4 40매 가량 분량이다. 연결이 다소 매끄럽지 못한 부분은 추후 수정할 예정.


민주주의의 미래[각주:1]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8. 05. 03.

최 태 준

xowns5186@gmail.com


1. 서론


‘민주주의의 미래’에 관해 강연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나는 한동안 고심했다. 첫째, 나는 이론적 영역만큼이나 경험과학의 영역으로써 민주주의를 다룬다. 경험과학이 주는 장점은 경험에 기반하여 인간의 행위를 예측함으로써 어느정도 미래를 가늠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미래는 이러한 방법으로도 예측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단순히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제도적 실체는 각 국가가 처한 지정학적, 정치적, 역사적, 사회적 조건들에 따라 매우 다른 양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행위를 가능한 한 예측가능한 범위 안에서 사고한다 하더라도,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는 요소들은 민주주의 제도를 운영하는 각 국가마다 다르게 나타나고 있으며, 정치는 인간의 의지와 역량이 개입되는 인공물의 세계라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미래는 어떤 논리적인 필연으로서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A라는 국가가 처한 조건들이 B라는 국가가 처한 조건들보다 덜 복잡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A국가의 민주주의 제도가 B국가보다 더 발전될 수 있으리라 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요컨대, 인간의 미래를 어떤 논리적인 귀결로써 낙관하거나 비관하려는 시도에 대해 나는 반대한다.


둘째, 민주주의가 처한 조건들을 ‘현실적인’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민주주의의 발전에 그다지 호의적이지는 않다. 가령 여전히 국경은 유효하며 세계 체제 차원으로 민주주의가 확대될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현재 시점으로 볼 땐 판타지 혹은 희망사항에 가깝다. 제 3세계 국가들은 여전히 민주화 단계를 밟고 있거나 혹은 민주화의 문턱에도 가지 못한 경우가 많고, 나아가 이들이 처한 경제적, 사회적 조건들은 민주주의의 정착과 발전에 호의적이지 않다. 단순히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자동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 제도들이 정착되고 안정화되는 단계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오랜 인고의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민주주의는 권력을 나누는 시스템이며, 권력의 정당성을 시민에게 부여하는 체제이다. 일련의 민주화 과정은 권력을 시민에게 돌려주는 과정인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정치세력, 이를테면 군벌이라든가, 유력 재산가라든가 하는 사람들은 권력을 독점하고자 하는 동기가 강하게 작용할 것이다. 민주화 과정은 이런 여러 도전을 견뎌내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민주화를 겪고 있거나 여전히 권위주의 체제인 국가의 시민들이 그것을 해낼 수 있는가? 여러모로 볼 때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오늘날 세계의 추세와는 정반대로, 민주주의의 물결은 주춤하고 있는 것 같다. 민주주의가 안정화된 제1세계 국가들 역시 여러 안팎으로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진부한 제목은 이미 20~30년 전부터 꾸준히 거론되어 왔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미래가 부정적인 요소들로부터 강하게 영향을 받고 있다고 의심받는 것이 현실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민주주의의 미래를 포기한다는 것을 선택할 수는 없다. 윈스턴 처칠이 말했듯, 민주주의는 인류가 선택한 통치 체제 중 최악의 체제라고 불려왔지만 그보다 나은 것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접근방법은, 민주주의의 미래가 이렇다 저렇다 말할 것이 아니라 현재 민주주의가 처해 있는 여러 조건들을 살펴봄으로써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여지를 탐색하는 것이겠다. 그 길이야말로 반(反)정치적이지 않으면서 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책임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미래는 언제나 불확실한 것이지만, 현재와 과거를 비추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섣불리 낙관하거나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는 대신, 현재까지 민주주의에 대해 도전장을 던지며 시민들을 향해 유혹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 여러 오답들 속으로 뛰어들지 않기 위한 지적인 인내심이야말로 우리가 가져야 할 미덕이다.


나는 민주주의의 개념적 이해와 실제, 나아가 그것이 포괄하는 여러 요소들에 관해 검토해볼 것이다. 민주주의는 분명한 제도적 실체를 가지는 체계(system)이며, 따라서 나는 민주주의의 이념적 이상향(Ideal type)과 실제를 구분하여 서술하려 노력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이상은 매력적인 것이지만, 천상의 것을 지상에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체제들은 결코 이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에 얽매여 있는 것이다. 가령 민주주의는 정치적 평등을 핵심으로 하는데, 이것을 실제로 지상에 구현해 놓은 것은 보통선거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보통선거권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평등이 완전히 달성되었는가? 그것은 아니라는 점은 누구라도 알 것이다. 요컨대 민주주의의 이상과 현실은 괴리되어 있다. 이 글은 바로 이런 현실적 여러 조건들을 구체적으로 탐색함으로써, 즉 민주주의의 과거와 현재를 탐색함으로써 민주주의의 미래를 어느 정도 가늠해보고, 인간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최선에 대해 고민해보고자 쓰여졌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수의 문헌을 참고했다. 후배들을 위해 하는 강연이니만큼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여러 문헌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며 민주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안내서가 될 수 있도록 소상히 설명하려 노력했다.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나 설명이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필자에게 연락이 닿는대로 보충설명을 해주도록 하겠다. 본 글이 이제 막 정치학으로의 여정을 시작하는 여러분들에게 작은 빛이 되길 희망한다. 아울러, 이 강연을 제안해준 후배 김현우 군에게 감사를 드린다.


2. 민주주의의 개념적 이해


왜 이념형인가


민주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민주주의의 이념형(Ideal type)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즉, 민주주의란 ‘무엇이어야만 하는가’라는, 규범적 진술(ought to)에 대해 살펴야 한다. 우리는 종종 민주주의를 두고 이상적 형태의 민주주의와 실제의 민주주의를 혼동하곤 한다. ‘민주주의’는 이상과 실제 모두를 포괄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규범적 진술와 서술적 진술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에 대한 큰 오해를 낳기 쉽다.[각주:2] 어려운 작업이겠지만, 구분할 수 있는 것들에 한해 구분해보는 것은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내가 민주주의의 ‘이념형’을 말하고자 할 때 그것은 특정한 형태의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 개념상 하나의 이상이다. 달리 말하면 추상화된 민주주의는 현실에서 매우 다양한 형태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모두가 민주주의를 증진시키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적 이상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이루어 갈 수 있을지에 대한 수단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합의점이 없다. 모두가 민주주의를 상이하게 이해하고 추구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논쟁적인 개념이다.[각주:3]


민주주의의 개념이 하나의 이상이기 때문에, 또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여러 노력들이 매우 상이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정의하기 어렵다면 민주주의를 규정하려는 노력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가? 이것이 우리의 작업에 있어 매우 곤란한 질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해명이 없다면 우리는 그 어떤 민주주의도 설명할 수 없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 나는 특정한 형태의 민주주의를 말할 것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민주주의를 통해 민주주의의 이상적 모델을 살펴볼 것이다. 다행히 인류는 민주주의를 경험해온 많은 역사가 있고, 역사 속에서 민주주의의 이념적 지표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는 두말 할 것 없이 고대 그리스이다.


민주주의의 기초: 아테네의 경우


민주주의는 고대 아테네에서 시작하여 여러 정치사상의 전통과 결합하며 오랜 기간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를 그다지 호의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에게 민주주의란, 가난한 자가 가진 자의 것을 빼앗는 체제로 여겨졌다. 플라톤 역시 민주주의를 반대했다. 그에게 민주주의란 어리석은 우중이 지배하는 형태에 불과할 뿐 ‘좋은 정치’를 만들어갈 수 없는 체제였다. 이후 오랜 기간, 민주주의는 여러 정치사상가들을 통해 최악의 정치체제로 그려져 왔다. 통치를 함에 있어 누군가는 통치를 할 ‘자격’을 가지고 있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자들의 오랜 관심은 어떻게 ‘좋은 통치자’를 세울 것인지, 그리고 그 통치자가 어떤 미덕과 자질을 지녀야 하는지에 치중되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민주주의를 부정적으로 여기게 만들었는가?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이념은 ‘정치적 평등’(political equality)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때 정치적 평등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능력이나 실적에 기초한 평등이 아닌, ‘산술적 평등’이다. 사람들이 실제로 어떤 능력이나 자질을 지녔는지에 관계 없이, 민주주의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평등한 것으로 간주한다.


정치적 평등을 기초로 한 민주주의의 최초의 정식화는 ‘인민의 지배’(Demokratia)’였다. 누구나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소수가 아닌 다수가 지배하는 것이 훨씬 정당하다는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민주주의를 뜻하는 데모크라시(Democracy)는 그리스어 ‘데모크라티아’(demokratia)가 어원이다. 데모크라티아는 demos(인민; the people)[각주:4] + kratos(지배)의 합성어이다. 그러나 이 정식화는 매우 모호한 측면을 남기고 있다. 예컨대, ‘인민의 지배’에서 ‘인민’은 무엇을 지배하는가? 또, 지배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을 조금 더 서술해보자. 그에 따르면 민주적 정의란 바로 산술적 평등에 기초하여 다수가 최고의 권력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인정할 수 없었지만, 민주주의는 엄격한 정치적 평등 아래에서 시민들의 자유를 실현시켜줄 수 있는 정치체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자유란 두 가지 기준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째, ‘번갈아 가면서 지배하고 지배 받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인간이란 오로지 도시국가(폴리스) 내에서만 완성될 수 있는 ‘정치적 동물’이다. 그런 점에서 최고의 선이란 폴리스에 종사하면서 자율적 통치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모두가 동등하게 자율적 통치과정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산술적 평등 없이는 불가능하다. 요컨대, 산술적 평등은 데모스에게 동등한 몫의 참여의 기회를 나누어줌으로써 ‘번갈아 지배하며 지배 받는’ 통치원리를 유효한 것으로 확립시킨다.


이로부터 자유의 두번째 기준, “자신이 원하는대로 사는 것”을 실현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모두에게 동등한 정치적 참여의 기회를 보장함으로써 한 사람의 자유가 다른 사람에 의해 부당하게 침해받지 않으면서 자율성을 최대한으로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자유와 평등은 결코 대립하는 것이 아니며, 엄격한 정치적 평등이야말로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런 점에서 “민주정체의 기본 원리는 자유다.”[각주:5]


로버트 달의 경우


민주주의에 대한 또다른 정식화는 20세기에 등장하였다. 그 이전에도 이미 여러 형태의 민주주의가 사람들에게 소개되었지만, 대부분 민주주의의 이상적 형태를 말할 뿐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형태로서의 민주주의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 중 어떤 부분은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자로 등장하기도 했다.


로버트 달은 민주주의의 개념적 이해를 진척시킨 선구자로 평가받는 정치학자이다. 그는 민주주의를 이상과 현실로 구분하고, 현실의 민주주의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중요한 지지의 근거들을 발견하였다. 이전까지의 민주주의론이 민주주의의 이상이 ‘무엇인지’ 대해서만 말했다면, 로버트 달은 현실의 민주주의를 평가할 수 있는 척도이자 기준점으로서 이상적 민주주의를 제시하였다.


그가 보기에 민주주의란 적어도 특정한 국가 내의 민주주의이다. 그리고 특정한 국가 내에서 정부 형태를 결정짓는 제도적 시스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를 하나의 이상적 관념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정치체(polity)로 여겼다. 귀족정, 군주정, 과두정과 같이 인류 공동체의 결사형태를 주조하는 정치체제의 한 유형으로 분류한 것이다. 로버트 달은 이 점에서 착안하여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이상적 조건들을 제시하였다.


로버트 달이 생각하기에, 이상적 민주주의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필요로 한다. (1) 모든 데모스의 효과적 참여, (2) 최종적인 결정을 내릴 때 모든 구성원이 투표할 수 있고 투표의 가치가 동등한 것으로 간주되는 투표의 평등 (3) 적절한 시간 안에 구성원들이 관련된 대안들과 그것이 가져올 여러 결과들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평등하고 효과적인 계몽적 이해의 획득 (4) 의제에 대한 최종적인 통제 (5) 데모스의 모든 구성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포괄성 (6) 데모스의 모든 구성원들이 앞선 조건들을 효과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기본권의 체계(Dahl. 1999; 2010).


이러한 조건들은 어떻게 도출되었는가? 로버트 달은 자신의 저서 『민주주의』에서 사고실험을 진행한다. 개인의 힘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의 협회를 설립했다고 가정하자. 이 때 누군가 협회를 운영하기 위하여 헌법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협회의 사람들 중 누군가는 능력 있고 식견을 가진 자에게 중요한 결정권을 위임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른 바 현능주의(meritocracy)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길게 인용할 필요가 있는 다음과 같은 주장에 의해 훌륭하게 반박된다.[각주:6]


“이 협회가 다루려고 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관하여, 우리들 중에서 나머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현명하여 자신의 견해가 일방적으로 우월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 가령 일부 회원들이 주어진 순간에 특정의 쟁점에 관하여 더 알고 있다손치더라도, 우리는 모두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을 배울 능력이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 우리들 사이에서 쟁점들을 토론하고 심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심의하고 토론하고 나서 정책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이 협회를 형성한 하나의 이유이다. 우리 모두는 쟁점에 대한 토론과 우리의 협회가 따라야 할 정책결정에 참여할 동등한 자격이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헌법은 그러한 가정에 기초하여야만 한다. 우리의 헌법은 우리 모두에게 협회의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야만 한다. 아주 평범하게 말한다면, 우리 모두는 동등한 자격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민주적으로 우리 스스로를 통치해야만 하는 것이다.”(Dahl, 1999)


여기서 한 가지 난관에 봉착한다. 존재하는 협회마다 존재하는 헌법이 다르고, 또 그 헌법들 중 어떤 것을 단일하게 ‘민주적’이라 말할 수는 없다. 어떤 헌법은 다른 헌법보다 더 민주적인가? 그렇다면 왜 그런가? 분명한 것은 그 모든 헌법들을 민주적이라 정당화하는 공통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로부터 민주주의의 두번째 정식화가 등장한다. 즉 민주주의란, 결정에 도달하기 위한 일련의 규칙과 원칙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규칙들을 정당화해주는 이념적 기초는 ‘정치적 평등’이다. 모든 협회의 헌법이 스스로를 민주적이라 자부한다고 할지라도, 헌법을 도출해내는 일련의 과정에서 정치적 평등을 소거한다면 민주주의는 성립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규칙을 고안하는 과정에서 모든 구성원들이 동등한 참가자격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요컨대 민주주의란, 정치적 평등을 기초로 특정한 결정 과정에 이르는 메커니즘이며,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시스템이다.


이것은 고대 아테네에서 정식화된 민주주의의 개념, 즉 ‘인민의 지배’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과거 아테네에서 ‘인민의 지배’라는 개념은 다소 불분명하고 모호한 부분을 남겼다. 그것은 이상과 실제가 혼합된 형태였다. 데모스의 평등한 정치적 참여를 중심으로 한 통치체를 의미했던 민주주의는 오늘날 거대화된 국가에서는 매우 부적합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아주 당연하게, 민주적 발상들의 대부분은 ‘국가를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현실적으로 제한되는 여러 조건들, 예컨대 거대화된 인구, 결정의 복잡성, 미비한 교육, 사회 혼란의 극복 등 여러 가지 변명들을 중심으로 반대되어 왔다. 그러나 로버트 달은 민주주의를 국가 단위에서 적용하고 실천할 수 있는 정치체계이자 현실에서 실천되는 민주주의를 평가할 수 있는 이상으로서의 민주주의를 구분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지지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들을 발견해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다음으로 건너간다. 왜 민주주의인가?


왜 민주주의인가


민주주의가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체제라면, 민주주의보다 더 나은 체제는 없는가? 민주주의는 다른 체제에 비해 무엇이 더욱 나은가? 오랜 기간 민주주의의 여러 반대자들과 비판자들은 민주주의를 공격하기 위해 다양한 논리를 개발해왔다. 가령 플라톤의 경우 ‘항해사의 비유’를 통해 민주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국가를 통치하는 것은 항해사가 배를 움직이는 것과 같다. 즉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기술과 전문지식을 갖춘 이들이 해야만 하며, 때때로 이들은 그들이 통치하는 이들의 이익을 훼손할지도 모르는 어려운 결정을 감행해야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 지도자는 대중의 평판에 의존하며 따라서 주의 깊은 판단, 어려운 결정, 거북한 대안 등을 대체로 회피하게 마련이다. 플라톤은 이런 사회에서는 권위에 대한 존경이나 질서, 안정이 있을 수 없고 오로지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암투와 단기적 이익에 눈이 먼 자들의 협잡질로 가득할 것이라고 여겼다.[각주:7]


로버트 달의 견해―내가 로버트 달을 중심적으로 인용하는 이유는, 앞서 말한대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민주주의가 ‘특정한 형태’의 것이기 때문이다―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이전까지 민주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들은,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중대한 정치적 결정을 하기에는 충분히 현명하지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통치를 소수에게 맡기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로버트 달은 이것을 두고 수호자주의(guardianship)라고 명명하며 비판하였다.


수호자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형태는 앞서 말한 플라톤의 소위 ‘철인통치’이다. 이외에도 수호자주의는 여러 가지 형태로 변주된다.[각주:8] 이러한 형태가 단기적으로 복잡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순하고 쉬운 길처럼 보일 수는 있어도, 권력을 소수 내지 일인에게 맡기는 형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다시 말해 정치적 평등과 본질적으로 다른 주장들에 대해 로버트 달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정당화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첫째, 액턴 경의 유명한 문구처럼,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통치자의 의도가 선한 것이든, 혹은 그가 공공선에 대해 얼마나 식견을 갖고 있든, 소수에게 집중된 권력 자원은 그들로 하여금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자원으로 전환하기 쉬워진다.


둘째, 존 스튜어트 밀이 주장했듯, 자유로운 토론과 논쟁이 진실을 추구하는 데 필수적이듯, 정부 정책에 대해 반대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시민들에 의해 견제되지 않는 정부는 때때로 엄청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가령 지난 20세기를 거치며 등장한 파시즘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학살극을 벌였다.


셋째, 권력을 가진 특권층이 노동계급과 여성, 인종적 소수자들이 정치참여로부터 배제될 때 그들이 참여로부터 배제된 이들의 이익을 평등하고 공평하게 고려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각주:9] 로크의 말처럼 개인은 언제나 자신의 이익에 있어서 최선의 심판자이며, 오로지 민주주의만이 이러한 조건을 충족해줄 수 있다.


로버트 달은 민주주의가 수호자주의를 비롯한 여러 다른 체제보다 다음과 같은 이점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각주:10] 로버트 달은 총 10가지의 이점을 말하는데, 지면상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고 여기에서는 세 가지 정도만 소개하도록 하자. 


먼저, 민주주의는 독재적인 지배를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인류 역사의 거의 대부분은 전제적 권력에 의한 통치였다. 그러나 전제적 권력은 그 장점들―효율적인 결정, 현명하고 지혜로운 판단 등―이 무색할 만큼 인류 역사에 큰 해악을 남겨왔다. “전제적 통치로 인한 인간적 손실은 질병, 기아,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손실과 대등한 것이다.”(Dahl, 1999)


둘째, 민주주의는 다른 어떤 체제들에서 보장하지 않았던 기본권을 보장해준다. 앞서 서술했듯이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기본적인 원리는 정치적 평등이며, 모든 시민들이 동등하게 정치적 참여에 관여하기 위해서는 그에 수반되는 필수적인 기본권들이 보장돼야 한다. 예컨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발언의 자유, 투표의 자유, 대안을 모색할 자유 등은 민주적 참여의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제공되어야 하는 기본권이다. 이러한 권리들을 소유하지 않는다면 앞서 제시했던 이상적 민주주의의 조건들을 충족할 수 없다. 또한 그러한 권리들이 단순히 헌법이나 다른 수단을 통해 약속되거나 선언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효과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주지하듯, 역사 속의 어떤 비민주주의 국가들도 이러한 권리들을 보장하지 않았다.


셋째, 민주주의적 정부만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결정의 자유(the freedom of self-determination)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최대한의 기회를 제공한다. 앞서 설명했던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떠올려보라. ‘인민의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최초의 정식화는 지배로 인한 자율성의 침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을 말한다. ‘번갈아 지배하고 지배 받는’ 형태야말로 지배로 인한 인간의 자율성의 훼손을 가장 크게 억제할 수 있는 형태였다. 인민은 피치자이자 통치자였다.


민주주의는 시민으로 하여금 자신이 스스로 부과한 법률에 복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인간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 중 하나는 내가 원하는 것과 타인이 원하는 것이 다르고, 그것이 충돌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인류 역사가 증명하듯, 이러한 충돌이 완전한 만장일치로 해소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이성적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대신 특정한 기준들을 만족시키는 일련의 규칙을 고안해내는 것이 보다 합당하지 않을까?


비록 이러한 과정이 모든 구성원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부과한 법에 복종할 수 있도록 완전하게 보장해주지는 못하지만, 구성원들이 그러한 규칙에 참여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의한 결정을 최대한으로 가능한 한도까지 확장할 수 있다. 오로지 민주주의 하에서만 이것이 가능하다.


민주주의의 매력


이상의 내용을 거칠게나마 요약하자. 긴 지면을 할애하여 아주 단편적으로 소개하긴 했지만,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출발점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한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편에 설 때 우리가 긍정하는 것은 (…) 어떤 인간이든 안장에 누인 채 세상에 태어난다거나, 누구든 말에 탈 부츠를 신고 박차 붙인 채 태어난다는 주장(혹은 판정)을 거부한다.”[각주:11] 


민주주의는 정치적 평등의 체제다. 이러한 원리 아래에서 민주주의는 인민 스스로 창출한 것이 아니면 그 어떤 정치적 선의 개념도 원칙적으로 수용을 거부한다(Held, 2010). 요컨대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에 정통성과 정당성을 부여하는 메커니즘으로써 민주주의는 옹호되어 왔다.


민주주의가 가지는 특별한 매력은, 자유와 평등, 정의와 윤리처럼 서로 대립하는 가치들 중 어느 하나를 옹호하는 사상이라기보다는 그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중재하고 매개하는 시스템으로써 옹호된다는 데 있다.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형태의 분쟁과 갈등을 정당하고 공정하게 중재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은 적어도 인류 역사에서 민주주의가 유일하다.


우리가 이상에서 민주주의의 개념들에 대해―비록 거칠긴 하지만―소상히 살펴본 이유는 바로 민주주의가 그러한 수단을 제공하기 위한 기반을 만드는 데 필요한 지침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가치들 간의 합의를 전제하지 않는다. 그보다 민주주의는 가치들을 서로 연관시키는 방법을 제시하며, 가치 충돌의 해결을 공적 과정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맡기는 방법을 제시한다.”(Held, 2010)


물론 현실에서 실천되는 민주주의는 우리가 이제까지 다룬 민주주의의 개념적 이해와는 간극이 있다. 이 간극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 절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실제에 대해서 다루어보면서, 그것이 민주주의의 개념적 이해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 나아가 현실의 민주주의가 어떤 요소들에 의해 제약되는지를 구체적으로 탐색할 것이다.


3. 민주주의의 실제


실천가능한 민주주의: 대의민주주의


현실에서 실천되는 민주주의는 두말할 것 없이 대의제 민주주의이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분명하게 대의민주주의이며, 대의민주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역사 속에서 여러 형태의 민주주의가 등장했다가 사라졌지만, 오늘날까지 대의제 민주주의만큼은 안정된 체제로서 자리매김했다. 그렇다면 두 가지 질문이 가능하다. 무엇이 대의민주주의를 안정적으로 만들었는가? 대의민주주의가 민주적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의민주주의를 ‘민주주의’라고 규정하는 것은 일견 부당해보인다. 장 자크 루소가 말한 것처럼, “영국 국민들은 투표할 때만 자유롭고 이후에는 노예가 되”는 상황이 오늘날 대의민주주의의 현주소가 아닌가? 대의민주주의의 어떤 점이 민주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직접 통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를 세우는 것이 어떤 점에서 민주주의의 원리와 충돌하지 않을 수 있는가? 어떤 급진주의자들은 대의민주주의가 시민의 요구를 즉각적으로 반영하지 못하므로, 시민의 요구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대의민주주의를 철폐하고 시민들의 직접 참여로 나아가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이른 바 ‘집회민주주의’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주장은 민주주의의 이상향에 대한 진술은 될 수 있어도 민주주의의 실제에 대한 설명은 제공하지 못한다.


소규모의 도시공동체 단위라면 집회민주주의가 장점을 가질 수도 있다. 모든 시민들이 정치 과정에 참여하고, 그들이 직접 통치과정에 관여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이상인 ‘인민의 지배’에 보다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충분히 자유롭고, 타인의 의견을 경청할 충분한 시간을 할애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더욱 만족스러운 민주적 결과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규모가 거대한 국가 단위에서 집회민주주의를 실천할 수는 없다. 규모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시간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각주:12]


우리의 관심의 초점은, 그러므로, 국가 단위까지 민주주의가 확장되었을 때,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국가 안에서의 민주주의이며,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시스템이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란,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정부의 형태를 일컫는다. 한 국가가 민주적으로 통치된다는 것은 국가의 권력이 데모스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데모스가 국가의 통치 권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이미 대의 제도는 오래 전부터 발달해왔다. 민주적 발상이 아니더라도,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대의제도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해 왔다. 존 스튜어트 밀은 이런 대의제도가 거대화된 국가를 민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적합하다는 사실이 발견했다. 그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민주주의에서 인민의 참여란 어느 정도여야만 하는가? 다시 말해, 사회의 어느 정도 수준까지 민주적으로 조직되어야 하는가? 둘째, 공적 생활에의 참여의 필요성은 복잡하고 숙련화된 행정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각주:13]


이상의 질문들에 대해, 그의 저서 『대의 정부론』에서 발견되는 다음과 같은 문구들을 눈여겨 보자.


“다음과 같은 것은 명백한 것이다. 사회의 온갖 긴급사태를 완벽하게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정부는 모든 인민이 참여하는 정부라는 것, 가장 작은 공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일지라도 어떠한 참여도 유용하다는 것, 공동체가 일반적으로 발전하는 데 허용되는 만큼의 광범위한 참여가 모든 곳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어느 것도 모든 사람들에게 국가의 주권을 공유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보다 궁극적으로 더 바람직한 것은 없다는 것, 그러나 하나의 조그만 마을을 넘어서는 공동체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공적 업무의 몇몇 작은 부분에 참여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공적 업무에 몸소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완벽한 정부의 이상적인 형태는 대의적 정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각주:14]


대의제 정부가 국가 단위에서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라는 점에 동의한다면, 질문은 다음으로 넘어간다. 이것을 실제로 지상에 구현할 수 있는 민주적 제도들은 무엇인가?


민주주의의 원리로부터 곧바로 국가 단위에서 적용 가능한 민주적 제도들을 열거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역사라는 훌륭한 선물이 있다. 현실에서 실제로 ‘민주주의’라고 불리우는 국가들의 여러 제도들을 비교해봄으로써 민주적으로 통치되는 일정한 기준점을 마련할 수는 있다.


로버트 달에 의하면 현대 대의민주주의는 다음과 같은 제도적 특징을 필요로 한다. (1) 선출직 공직자 (2) 자유롭고 공정하며 빈번한 선거 (3) 표현의 자유 (4) 선택의 여지가 있는 정보원에의 접근 (5) 결사의 자율성 (6) 융합적 시민권.[각주:15]


이러한 제도들은 비록 각각 발생한 연원이 다르고, 심지어 어떤 것은 민주적 발상에 근거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오늘날 존재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발견되는 일반적인 특징들이라 말할 수 있다. 앞서 우리는 이상적 민주주의의 여러 조건들을 탐색했다. 대의민주주의 역시 이러한 조건들에 근거하여, 비록 만족스럽진 못하더라도, 민주주의의 조건들을 어느 정도는 충족할 수 있다.


분리된 세계를 연결하는 방법


대의민주주의가 그 모순에도 불구하고 민주적일 수 있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문제가 남는다. 대의민주주의는 엄밀한 의미에서 따져볼 때, ‘인민의 지배’라는 개념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다. 데모스는 통치 과정에 아주 작은 부분일지라도 참여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지배자는 아니다. 통치 업무의 기회가 그들에게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한 가지 사실을 추론할 수 있는데, 규모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통치자와 피치자 사이의 분리를 낳는다는 점이다. 나아가 오늘날 대의민주주의가 유효한 통치 원리로서 확립된 데에는 시장자본주의의 발달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시장자본주의가 발달은 곧 재산권의 발견과 함께, 사적 영역으로부터 공적 영역을 분리시켰기 때문이다.


고대 아테네에서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아테네에서 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되었다.[각주:16] 정치에 관여한다는 것, 즉 공적 업무를 맡아서 한다는 것은 시민적 덕성을 완성시키는 궁극의 기술로 여겨졌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모든 일반 시민이 공적 업무를 맡아서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장자본주의의 영향 아래 있는 시민들은 일상적 삶을 영위하기 위해 시간과 체력을 투자하여 일을 해야만 하고, 그것은 곧 이들이 공적 업무에 전반적으로 투신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자본주의의 영향이 불식되지 않는 한, 현대 정치에서 이러한 분리를 철폐한다는 것은 공허한 주장에 가깝다.


대표자를 선출하는 원리는 이러한 조건들 하에서 유효하다. 모든 시민이 공적 업무를 맡을 수 없으므로, 공적 업무를 맡을 만한 사람들―곧, 직업정치인―에게 결정권을 위임하는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가 대의민주주의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규모의 문제와 함께 정치와 일상이 분리되어 있는 조건에서, 오로지 대의민주주의만이 시민들의 정치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의민주주의에서는 얼마나 시민을 잘 대표하느냐, 곧 대표성의 문제가 대두된다.


여기에서 다른 중요한 문제가 남는다. 통치자-피치자가 분리될 수 밖에 없다면, 어떻게 피치자로 하여금 통치자를 구속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 주기적이고 빈번한 선거를 치르더라도, 선거를 치르지 않는 기간 동안 통치자들은 주권자들에 반하여 자의적인 권력을 배양할 수 있지 않을까? 피치자들은 통치자와 그들의 행위를 어느 정도 수준까지 공적 심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어떻게 책임성을 부여할 것인가?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대의제 하에서 선출된 대표들이 공공선을 이루어 가리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민주주의자들에게는 무척이나 곤란한 질문이다. “책임의 부과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야말로 하나의 통치 체제로서 민주주의가 갖는 핵심적 약점이 아닐 수 없다.”(최장집, 2010) 비록 곤란한 질문이기는 하지만, 대의민주주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일 수 있는 또다른 전통들이 있다. 분리된 세계를 연결하는 훌륭한 방법들은 이미 제시되어 있었다.


파벌의 문제


오랜 기간 정치철학자들의 가장 지대한 관심 중 하나는 어떻게 시민들을 더욱 훌륭한 덕성을 지닌 인간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에 복무하는 것, 곧 공적 업무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덕성을 실현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이라고 찬양하였다. 마찬가지로, 르네상스 시기에 등장한 공화주의자들 역시 어떻게 ‘좋은 시민’을 만들 것인지에 골몰하였다. 오랜 기간 시민적 덕성이란, 파벌들이 억제되고 국가 내지 공동체의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경향을 뜻해왔다. 갈등과 분열은 부정적인 것으로서 사회의 통합과 발전을 저해하는 것으로 간주됐다.


이런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미국 헌법을 정초한 제임스 매디슨은 파벌의 문제에 골몰하였다. 그는 『연방주의자 논집』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각주:17]


“파벌의 원인을 제거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파벌의 존재에 필수적인 자유를 없애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민 각자에게 동일한 의견, 동일한 열정, 동일한 관심사를 갖게 하는 것이다.”(Madison, 김동영 역, 1995, 강조 필자)


매디슨은 파벌을 없앨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비록 부정적이기는 하지만, 자유가 있는 한 파벌은 반드시 존재한다고 여겼다. 따라서 “그가 설정한 과제는, ‘다양하고 상호 충돌하는 이해관계들’을 조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필수적이고 정규적인 정부의 활동과 운영’에 열중하도록 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Held, 2015).[각주:18]


인간 사회가 다양하고 상충하는 이익들로 분화되어 있으며, 따라서 파벌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매디슨의 지적은 타당해 보인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어 보자. 파벌을 없앨 수 없다면, 파벌을 긍정하면 되지 않을까? 파벌이 만들어내는 효과란 반드시 부정적인 것일까? 이런 아이디어 위에서 20세기 정치학자 중 한 명인 샤츠슈나이더(1892-1971)는 정당의 존재를 발견하였다.


갈등에 기반을 둔 체제


샤츠슈나이더는 민주주의를 ‘갈등에 기반을 둔 체제’라고 정의한다.[각주:19] 사회는 다양한 이익으로 분화되어 있으며, 이들 사이의 갈등과 충돌은 불가피하다. 한 마디로, 갈등 없는 사회는 없다. 갈등이 없는 사회란, 특정한 강자가 모든 것을 휘어잡고 갈등을 억압하고 있거나,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회일 것이다. 건강한 사회는 갈등의 제거를 주문하지 않는다. 대신 갈등의 표현을 주문한다. 민주주의가 가지는 긍정적 효과는 이러한 갈등이 표현되고 경쟁함으로써 공적 영역 내로 흡수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경쟁하는 가치와 이익을 두고 갈등하는 ‘집단들’[각주:20] 사이에서 정당하고 합당한 결정과정에 이르는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정당은 19세기 영국에서 발명되었지만, 비슷한 기원은 다른 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전까지는 부정적이고 탐탁치 않은 것으로 여겨졌던 정당이 어떻게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샤츠슈나이더의 설명을 좀 더 들어보자. 일단 갈등이 발생하면, 여러가지 요인으로 인해 강자와 약자가 나뉘게 된다. 이 때 강자는 갈등을 사사화 내지 국지화하려 할 것이다. 그것이 자신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반면 약자는 승리를 위해 주변의 구경꾼을 끌어들이려 한다. 갈등을 사회화하는 것이다. 갈등의 주변에 있던 구경꾼들이 갈등에 참여하게 되면 강자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게 된다.[각주:21]


이와 유사한 사례가 정당 간 경쟁에서도 등장한다. 초기의 정당은 비슷한 의견을 지닌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주로 명망가나 귀족들이 주요한 구성원이었다. 그러나 선거권이 확대되면서 국면은 달라졌다. 약한 정당은 승리를 위해 유권자들에게 호소하게 되었다. 사회 하층이 본격적으로 정치의 장으로 동원되기 시작하면서 정치의 양상은 달라졌다. 이것을 두고 ‘좌파로부터의 전염’(contagion from the left)이라 부른다. 이들 사회 하층을 본격적으로 조직하고 동원하는 대중정당(mass party)이 출현하면서, 기존의 부르주아나 명망가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정당들도 대중의 요구에 반응할 수 밖에 없었다. 중세를 거치며 귀족과 유력 자산가 등 교육받은 상층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정치가 본격적으로 대중적인 것으로 변모한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정당이 중요한 정치적 기구로 부상하게 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가능했다.


왜 정당인가


정당의 가장 큰 역할은 갈등을 동원하고 사회화하는 것이다. 참여의 범위가 늘면서 갈등의 범위와 종류도 다양해졌다. 정당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이런 여러 갈등을 조직하고 동원한다. 현대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일 수 있는 이유는 정당이 있기 때문이다. 정당은 갈등을 조직하고 동원함으로써 시민을 정치과정에 참여시킨다. 정당이 없다면 시민은 갈등 해결에 있어 개인적 투쟁을 할 수 밖에 없거나, 혹은 영향력이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는 시민결사체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다. 정당은 갈등을 사회화함으로써 시민들이 비교적 공평한 환경에서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통로를 개척한다. 그런 점에서 정당이 없는 민주주의는 상상할 수 없다. 


정당이 아니라 선거와 대의제가 민주주의의 핵심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선거와 대의제가 도입됐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민주주의가 작동하지는 않는다. 단적으로 말해, 선거와 대의제는 그 자체로는 민주적 제도가 아니다. 로마에서도 선거와 대의제는 존재했다. 그러나 아무도 로마를 민주주의라고 부르지 않는다.


선거와 대의제 같은 제도들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핵심적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참여의 범위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샤츠슈나이더의 개념을 빌어 말하자면, 갈등의 범위가 확대된 것이다. 오늘날 현대 민주주의에서 대의민주주의가 널리 안정될 수 있었던 것은 대중정당이 출현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중정당은 어떤 민주적 충격을 가져왔는가?


대중정당이 가지는 가장 큰 효과 중 하나는 참여의 조직화이다. 참여의 범위가 늘면서 정당은 그 자신의 기반을 명사로부터 대중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정당은 ‘세계관의 조직자’로서 사회를 분할해 나갔다. 이것을 ‘분할 조직화’라고 말한다. 앞서 시장자본주의가 사적영역을 공적 영역으로부터 분리했다는 말을 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자율적 시민사회의 영역이 등장했다는 말과 같다. 자율적 영역 안에서 시민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집단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노동조합이다. 정당들은 이들 조직들을 자신들의 기반으로 만들어 갔다. 사회 내 존재하던 여러 집단들은 자신들만의 싸움으로 해결할 수 없던 것을 정당을 끌어들임으로써 해결하려 하였다. 정당 간 경쟁은 바로 이런 갈등의 분포를 두고 전개되었다. 요컨대, 정당은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분리를 매개한다.


갈등이 정당을 중심에 두고 전개되면서 역설적으로 사회 통합적인 효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정당을 통해 갈등이 표출되면, 갈등은 공적 영역 내에서 논의되고 조정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다양하게 경쟁하는 여러 가치, 이익, 이념들 사이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담보해주는 것은 시민이다. 시민의 지지와 동의를 얻는 정당만이 정당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사회를 가로지르는 여러 갈등의 축 중에서 특별히 오래 지속되고 포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갈등을 두고 ‘균열’(cleavage)[각주:22]이라 지칭한다. 어떤 균열들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인종, 종교 문제는 오랜 기간 서구 사회에서 대단히 위험한 성격의 갈등을 야기했다. 반면 어떤 균열들은 조정되거나 합의될 수 있는 성격을 가진다. 어떤 것이든, 균열들은 사회를 분열하고 해체시키는 힘을 갖는다.


정당이 균열을 대표함으로써, 다시 말해 공적 영역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민주주의는 이런 위험한 균열들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여기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정당이 한 개가 아니라 복수의 정당이며, 이들 사이에 경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정당 간 경쟁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존립할 수 없다.


정당 경쟁은 일정한 체계를 갖는다. 정당 체계는 바로 사회적 균열의 축을 따라 형성된다. 균열의 축을 따라 대립하는 정당이 두 개라면 양당제, 세 개 혹은 그 이상이라면 다당제라고 부른다. 민주주의 체제가 안정적일 수 있는 이유는, 정당들이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경쟁하며 사회에 존재하는 다원적 갈등을 동원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정당 간의 민주주의이다.


현대 민주주의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는 서로 다른 이념이나 종교를 가졌다고 해서 총칼을 들고 열전을 벌이는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는, 애덤 셰보르스키가 간명하게 정의한 것처럼, ‘서로 죽이지 않는 체제’이다. 사회 내에 존재하는 다원적 이익과 열정들을, 복수의 정당들이 조직함으로써 공적 영역으로 끌어온다. 한 마디로, 정당이 존재하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셈이다.


요약


이제까지의 질문과 답변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1) 민주주의는 정치적 평등의 체제이다. (2) 그러나 규모가 거대해진 현대 국가에서 실천되는 가장 적합한 형태의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이다. (3) 민주주의는 결정 과정에 이르는 일련의 메커니즘이며, 국가 권력을 평등한 시민권 위에 정초하는 것을 말한다. (4) 현대 사회는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분리를 전제한다. (5) 국가 권력이 평등한 시민권 위에 정초되기 위해서는, 시민사회로부터 분리된 정치사회를 효과적으로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 (6) 정당은 갈등을 동원함으로써 시민사회와 정치사회를 매개한다. (7) 복수의 정당들 간의 경쟁은 시민사회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갈등을 공적 영역으로 흡수하고, 이들 사이의 평화로운 중재와 조정을 가능케 한다. (8) 참여의 범위가 넓어짐으로써 선거와 대의제 역시 민주적으로 기능할 수 있게 되었다. (9) 대의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일 수 있는 이유는 정당의 존재 때문이다. (10) 그러므로 대의민주주의는 정당민주주의이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배경이자, 민주주의의 실제이다. ‘인민의 지배’라는 최초의 이상과는 다소 멀긴 하지만,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이것이 현실에서 실천되는 민주주의이며, 그에 대한 이론적 설명이다. 대의민주주의 역시 분명하게 정치적 평등을 기반으로 한 체제이며, 정당은 현실적 제약 속에서 정치적 평등을 실현할 수 있는 통로를 개척했다. 


이로써 앞서 우리가 던졌던 두 가지 질문들에 대한 해명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간단히 말해, 대의민주주의가 민주적일 수 있고 안정적일 수 있는 이유는 정당들이 시민사회와 정치사회를 매개하며 경쟁하기 때문이다. 이상의 소결론에 여러분이 동의했다면,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자. 


적어도 오늘날까지의 상황으로 비추어 보건대, 대의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운용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런 현실과는 전혀 다르게 곳곳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한다. 무엇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가? 정당을 통해서 시민의 정치적 평등은 보다 완전해졌는가? 아니면, 다른 요소들에 의해서 위협받고 있는가? 다음 절에서 그 요소들에 대해 살펴보자. 


4. 정치적 평등의 확대를 가로막는 장애물들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는 말은, 정치적 평등이 위협받고 있다는 말이다. 앞서 살펴 본 이제까지의 이론적 논의들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민주주의가 다른 체제보다 더 나은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오늘날까지 안정적인 체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데 치중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의 민주주의는 우리들이 이제까지 이론적으로 살펴본 것과는 다르게 매우 위태로워 보인다. 무엇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가?


대의민주주의의 핵심적 원리는 정치적 평등을 기반으로 한 시민의 광범위한 참여와, 이들을 조직하고 대표하는 정당들 사이의 경쟁이라 말할 수 있다. 이 때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첫째, 정당은 어떻게 시민들을 효과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가? 둘째, 시민의 이익, 열정, 가치, 이념을 대표하는 정당은 어떻게 시민들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요컨대, 대의민주주의를 관통하는 두 가지 핵심적 명제가 있다면 바로 대표성과 책임성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대의민주주의의 숱한 위기는 바로 대표성과 책임성의 연계가 약화되는 것으로부터 비롯한다. 허약한 대표성, 책임지지 않는 정당, 이행되지 않는 약속,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분리로부터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자의적 권력, 정치에 대한 반감 내지 참여의 비효능감으로 인해 발생하는 저조한 투표율 등등 대표성과 책임성의 연계를 약화시키는 요인은 숱하게 많다. 우리는 이 짧은 지면에서 그 수많은 요인들을 모두 다룰 수는 없다. 대신 우리는 정치적 평등을 분명하게 위협하는 세 가지 요소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시장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 중에서 자본주의에 기초하지 않은 국가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건강한 자본주의의 발전은 권위주의적 통치 구조를 형해화시키고 민주주의의 발달을 촉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시장의 도전은 민주주의를 훼손하려고 시도한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시장은 민주적 조정의 범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다. 기업가들 중 노사관계 문제를 의회 안으로 끌고 가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세계화의 진전과 함께 자본주의를 채택한 국가들은 확대되는 시장의 영향력 아래 노출되었다. 시장의 확대와 발전은 인류 역사에 있어 위대한 진전 중 하나이지만, 동시에 민주주의에 항구적인 피해를 입힐 수도 있는 해악들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각주:23]


(1) 실업 (2) 확대되는 비숙련 고용 (3) 궁핍화 (4) 빈곤의 지속 (5) 주거문제 (6) 자존감, 자신감의 훼손 (7) 작업 환경으로 인한 신체적 장애…….


요컨대 시장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낳고, 이것은 불가피하게 정치적 자원[각주:24]의 불균등한 분배의 확대에 기여한다. 슬픈 일이지만, 시장이 이러한 해악을 낳고 있다 하더라도 현재까지 인류는 시장경제를 대체할 만한 적당한 경제 체제를 찾지 못했다. 다만 시장을 민주적 조정의 범위 안에 놓음으로써, 시장이 낳는 해악들을 줄여갈 수 있는 가능성은 경험했다. 시장에서 패배하거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민주적 제도들을 통해 자신들을 구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국가(들)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인류는 두 가지 문제에 봉착하였다. 첫째는 세계가 단일한 정부를 가지기 매우 곤란하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새로운 형태의 갈등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전 지구적으로 확대되는 테러리즘의 위협이 대표적이다. 무차별적으로 가해지는 테러리즘의 위협은 시민들로 하여금 국가에게 더욱 강한 안전보장을 취할 것을 요구했다. 요컨대 국가는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각주:25] 국가는 시민들에게 행정과 안보 등 생활에 필요한 편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으로, 시민은 주권자의 지위로부터 고객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제 시민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각주:26]


세계가 단일한 정부를 가지기 어렵다는 사실은 또다른 측면에서 문제를 야기한다. 매우 분명하게, 오늘날 국제 체제가 필요하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그러나 국제 체제는 전혀 민주적이지 않다. 때때로 국제 체제 안에서 국가들은 자신이 가진 압도적인 군사력이나 경제력을 동원해 상대 국가를 압박한다. 또 국제 체제 안에서 기능하는 여러 국제기구들은 전혀 민주적이지 않다. 가령 한 국가의 경제 구조를 좌지우지해왔던 IMF의 경우, 오랫동안 그 내부적 결정과정이 완전히 비밀리에 부쳐져 있었다. 일국적 단위에서 시장은 민주적 조정의 범위 안에 들어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제적 단위로 확장된 시장의 압박으로부터 시장에 대한 국가의 규제들이 자유로울 수 있을까? 더욱이 이러한 국제 체제 하에서 주요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시민이 아니라 ‘다원적 엘리트’라는 사실이다.


비록 국가가 세계화의 영향으로 인해 약화될지 혹은 강화될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국가들’ 사이에서 야기되는 여러 문제는 시민들의 영향을 축소시키고 있음에는 분명하다.


관료


국가가 거대해지면서 동시에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전문적 기술을 가진 집단인 관료 역시 거대화되었다. 관료들은 국가를 통치하고 운영하는 데 필요한 세부적인 부서들에 배속되어 임무를 부여 받는다. 이들은 그를 위해 전문적인 기술을 훈련 받고, 거대한 분업 체계 안에서 국가를 운영하는 톱니바퀴 역할을 해준다.


현대사회에서 관료의 존재 없이 국가의 존속과 행정 서비스의 제공이 가능하리라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허황된 것이다. 그러나 관료의 거대화는, 한 편에서는 행정 서비스의 확대를 낳았지만, 동시에 시민과 분리된 존재로서 관료가 독자적 영역을 구축하도록 만들었다. 관료는 시민에 의해 통제되는 집단이 아니다. 많은 경우 이들은 직종의 전문성으로 인해 선발된다. 달리 말해, 관료는 시민들로부터의 대표성은 없지만 국가를 운영하고 통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관료집단의 거대화는 국가의 통치에 있어 시민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대신 관료의 영향력이 늘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많은 국가에서 관료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있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관료의 영향력이 늘면 늘수록, 시민의 통제력은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시민은 관료에게 행정서비스를 제공받고, 관료에게 순응한다. 관료들은 점차적으로 중요한 정치적 결정까지 위임 받을지도 모른다. 간단히 말해, 관료는 더 이상 시민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 위에 군림할 수도 있다.


부정적인 미래? 대안의 모색


좋든 싫든,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정치적 평등은 광범한 영역에서 공격받으며 시민의 자리를 축소시켜 가고 있다. 민주주의가 공격받는 시점에서, 우리는 두 가지 방향을 모색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정의를 축소하는 것이다. 조지프 슘페터는 민주주의란 단지 “모든 문제에 대한 결정권을 특정 개인들에게 부여하는 방식을 통해 정치적 결정에 도달하려는 제도적 장치”라고 규정했다(Capitalism, 269). 시민의 몫은 경쟁적인 지도자들 사이에서 누구에게 정당성을 부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요컨대, 민주주의는 단지 “한 정부를 다른 정부로 교체할 수 있는 능력”일 뿐,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그의 지적은 ‘인민의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고전적 정의와는 아주 약한 연결고리만을 갖는 것이다. 슘페터 자신도 그 점을 지적한다. “민주주의는 다만 인민이, 그들을 지배할 예정인 사람들을 승인하거나 또는 부인할 기회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할 따름이다.”(Capitalism, 284) 슘페터의 지적이 옳다면, 민주주의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다. 인민은 단지 지배자를 승인하거나 부인하는 데 머물 뿐이며, 그 이상의 어떤 참여도 불필요하며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슘페터의 이런 주장은 매우 의심스럽다. 슘페터의 주장은 선출직 엘리트와 개별 시민이라는 이원적 구조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 사회를 조직하는 다양한 형태의 제도와 조직―중간 집단―은 무시된다.[각주:27]


슘페터의 주장은 현대 사회에서 모든 인민이 통치자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는 것으로 충분할 듯 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민주주의를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한다. 슘페터는 단지 개별 시민과 엘리트 사이의 대표와 책임만을 드러냈을 뿐이다. 조금은 아쉽지만, 슘페터의 지적은 일정 부분 진실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민주주의의 정의를 축소하는 것이 아닌, 민주주의로의 또다른 길은 바로 권력의 중심을 분산시키는 것이다. 명백히 민주적 원리들은 권력의 분산을 요구한다. 복수의 정당 체계, 다원화된 이익집단, 평등한 투표권 등 민주적 원리들은 특정한 집단이나 개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반대한다. 현대 사회에서 권력을 분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까?


로버트 달은 다원주의 이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내가 글의 서두에서 ‘특정한 유형의 민주주의’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다원주의적-정당주의적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뒤에 후술하겠지만,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서, 나의 견해는 로버트 달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우선 달의 주장을 보자.


사회는 다양한 이익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오늘날 현대 정치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이익 정치라 말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자율적 결사체들의 존재를 긍정하는 체제이다. 따라서 자율적 시민사회 안에서 시민들은 자신의 이익에 따라 다양한 결사체들을 조직할 수 있고, 또 그래왔다. 


다원주의의 핵심적 주장은 간명하다. 어떤 권력도 독점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정부는 시민들로부터 선거를 통해 권력을 위임 받은 존재이지만, 정부는 단일한 기구가 아니다. 정부를 구성하는 세부적인 기구들 역시 특수한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은 결코 단일한 중심을 가지고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특수 이익을 놓고 여러 경쟁하는 집단들 사이에서의 크고 작은 협상과 거래의 연장선상이라 볼 수 있다.


경쟁하는 이익들 사이의 균형이 발생한다면 권력은 독점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민주주의는 작동할 것이다. 달리 말해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더라도 작동할 수 있다. 정치적 무관심은 오히려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Lipset 1963, 32, n.20). 주기적 선거와 경쟁하는 정당, 집단, 개인에 의해 정치인들의 행동이 제약될 수 있다면 그 사회의 민주주의는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각주:28]


다원주의는 일견 굉장히 매력적인 제안처럼 들린다. 실제로 달은 도시정치를 분석한 저서 『누가 통치하는가?』(Who Governs?)에서 공공 정책에 영향을 미치려는 다수의 연합이 있음을 증명해냈다. 단기적으로는 이러한 분파들의 갈등이 심각해보일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 이들은 균형을 이루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달의 다원주의론은 정부를 ‘중립적 중재자’로 간주한다는 데서 심각한 약점을 드러낸다. 정부는 ‘중립적 중재자’인가? 찰스 린드블롬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각주:29]


“시장체제의 공적 기능은 기업가들이 담당하기 때문에 일자리, 가격, 생산, 성장, 생활수준, 모든 사람의 경제적 안전 등이 모두 그들의 수중에 달려 있게 된다. 결과적으로 정부 공직자들은 기업이 그 기능을 얼마나 잘 수행하는가에 대해 무관심 할 수 없다. 불황이나 인플레이션, 기타의 경제적 재앙 등은 정부를 붕괴시킬 수 있다. 따라서 정부의 주요 기능은 기업가들이 그들의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다.”(Lindblom 1977, 122-123, 강조 필자.)


따라서 “정부의 정책은 적어도 사기업이나 기업 권력 체제의 발전에 유리한 의제, 즉 그쪽으로 편향된 정치적 의제를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Held, 2015)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만들어내는 이러한 경향―상층 편향적 경향―을 억제하지 못한다면, 다원주의의 주장은 그저 규범적 진술에 불과할 수도 있다. 샤츠슈나이더가 지적한 것처럼 “다원주의가 지향하는 천국의 문제는 천상의 합창에서 상층계급의 목소리가 가장 크게 들린다는 것이다.”[각주:30]


좋든 싫든 오늘날 민주주의가 무엇이고 또 무엇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너무나 복잡해진 문제 같다. 이 쯤에서 나의 견해를 조심스럽게 밝힐 필요가 있겠다. 앞서 말했던, ‘다원주의적-정당주의적 민주주의’가 하나의 대안일 수 있다는 견해이다.


민주주의는 인민 주권의 원리와 그에 기반한 대중 참여를 원칙으로 한다. 크든 작든 대중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정치에 관여하게 된다. 민주주의의 역동성은 바로 ‘보통 사람’들의 참여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때 참여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조직되는 ‘조직화된 참여’를 말한다. 요컨대 민주주의를 강화한다는 것은 곧, 권력을 아래로부터 조직하고 창출하는 투입 중심의 정치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정치의 투입 과정에는 다양한 행위자들이 관여한다. 이익집단과 같은 압력단체부터, 명망 있는 개인, 기업 등은 투입 과정에 참여하는 대표적인 행위자들이다. 다원주의 이론은 이 과정에서 다양한 소규모 이익집단들 사이의 경쟁과 균형을 강조한다. 그러나 나는 이익집단들을 매개하는 역할로써 ‘다원적 정당 체계’가 보다 좋은 형태라고 생각한다. ‘다원주의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정당 체계의 다원성을 말하는 것이다. 사회 각계 각층에 널리 퍼져 있는 사회경제적 요구와 이익을 반영할 수 있도록 정당 체계가 보다 넓은 지평으로 확장될 수 있어야 한다.


한 편, ‘정당주의적’이라는 것은 정치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행위자로서 정당을 말한다. 이익집단은 자신들의 배타적 이익을 추구하는 소규모 집단이고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정당은 이념, 가치, 세계관에 기초하여 이익집단보다 훨씬 넓은 범위의 갈등을 포괄할 수 있다. 이익집단 정치에서 소규모 이익집단은 거대한 대규모 이익집단과의 대결에서 승산을 장담할 수 없지만, 정당을 매개로 할 때 이들은 평등한 투표권을 지닌 시민으로서 동등한 자격을 가진 이들로 간주된다. 요컨대, 정당은 사회의 다양한 부분을 폭넓게 조직하고 동원함으로써, 정치적 평등에 기초한 갈등의 중재를 시도할 수 있도록 해준다.


‘민주주의의 미래’라고 할 때, 그것이 과연 전 세계적인 수준에서의 민주주의를 의미하는지, 민주주의의 일반적 정의의 형해화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국적 수준에서의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전 세계적인 수준에서의 민주주의나 민주주의의 개념에 의거하여 검토해보자면 민주주의의 미래는 그다지 밝지 않다. 일국적 수준에서의 민주주의로 문제를 좁힌다면, 민주주의를 둘러싼 여러 조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훨씬 많은 문제를 수반한다.


일국적 수준에서 민주주의를 둘러싼 여러 조건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탐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이야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제 질문의 범위를 좁혀보자.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떤가? 민주주의를 탐구하는 긴 여정의 마지막으로 나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검토해보고,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면밀히 살펴보겠다.


5. 한국의 민주주의


한국 정치의 다이내믹스는 어디에서 오는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의 정치는 권위주의 정권 시절을 연상케 하였다. 그러나 강권기구를 동원해 통치를 이어가던 대통령은 결국 탄핵되었고,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였다. 그 뿐인가. 민주화 운동부터 시작해서 민주화 이후에도 거대한 운동이 주기적으로 분출되었다. 이처럼 한국 정치의 다이내믹스를 창출해내는 근원은 무엇인가?


한국 정치, 한국 민주주의의 다이내믹스를 면밀히 검토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먼저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아마도 내 생각에는 금세기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학자 최장집은 한국의 민주화를 두 차원으로 구분한다. 하나는 ‘운동에 의한 민주화’이고 다른 하나는 보수적 엘리트 사이의 ‘협약’에 의한 보수적 민주화이다.[각주:31]


운동에 의한 민주화와 협약에 의한 민주화


운동에 의한 민주화는 한국의 민주화 이행에 있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결합된 형태의 사회운동이 민주화에 있어 주도적 역할을 했음을 의미한다. 이 때 민주화의 구체적인 내용은 강력한 권위주의적 국가에 대항하여 대안적 정부를 창출해내는 것이었다. 4.19 혁명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모두 이런 성격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화를 단순히 운동에 의한 민주화로만 볼 수는 없다. 거대화하여 분출한 운동은 구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기여했음은 틀림 없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화에서 운동의 역할은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첫째, 축적된 교육자본을 바탕으로 성장한 학생들이 운동의 중심 축이었다. 학생운동이 민주화 운동에서 중심 축을 담당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은 제도권 야당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야당은 다만 ‘충성스러운 야당’일 뿐 전혀 기능하지 못했다. 야당은 왜 기능을 하지 못했는가? 


한국의 민주주의는 서구 유럽의 경험처럼 아래로부터 대중에 의해 조직된 경험을 전혀 쌓지 못했다. 해방 이후 들어선 미군정과 지정학적 조건에 의해 강제된 냉전 반공주의의 영향 아래에 놓였기 때문이다. 냉전 반공주의라는 조건은 야당의 운신의 폭을 극단적으로 좁혀 놓았다. 일제로부터 해방되면서 형성된 ‘해방 공간’은 여러 정당들이 사회를 각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지만, 미군정의 시작과 더불어 불어닥친 냉전의 광풍은 한국 사회가 다양한 이념의 틀로서 사회를 조직하고 경쟁할 기회를 박탈했다. 


민주주의는 특정한 이념의 가치에 무게를 두는 체제가 아니다. 다만 그것은 한 사회를 대표할 수 있는 이념이나 가치들이 경쟁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한국은 각 정당들이 자신들의 이념을 기초로 대중을 조직할 기회가 없었다. 어떤 사회경제적 가치들은 특정한 단어를 통해서만 표현할 수 있지만, 냉전은 그런 단어의 사용들조차 불온시했고, 정치적 억압의 대상으로 삼았다. 최장집은 냉전 반공주의가 “정치적 갈등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양분”하고, “광범위한 중간 영역의 존재를 부정”하며, “정치 경쟁의 양상을 극한의 적대 관계로 몰아갈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반대 세력과 비판자들을 억압”하는 부정적 효과를 가진다고 말한다.[각주:32]


요컨대, 다양한 사회경제적 갈등을 적절하게 표출하고 대표할 만한 이념적 기초를 가지는 데 실패했고, 그 결과 냉전이라는 틀 안에서 대표될 수 있었던 것은 보수주의가 유일했다. 


어떤 사람은 한국이 보통선거권이 주어졌고, 복수정당제를 채택했으며, 정기적인 선거를 치르는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했으므로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며 그렇게 출발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민주주의의 외형적인 모습에 초점을 맞춘 것일 뿐, 그것이 실제로 효과적으로 작동하느냐는 설명하지 못한다. 일거에 주어진 보통선거권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는 민주적인 것으로 만들었지만, 실천적 의미에서는 민주적 내용을 구성할 수 없었다. 보통선거권의 도입으로 참여의 범위가 확대됨으로써 다양한 사회의 이익이 정당 체제로 발전한 것도 아니었고, 당연히 대중정당으로의 발전 역시 있을 수 없었다. 당의 생존을 위해 대안적 이념과 정책의 도입을 추구하기보다 기존에 형성된 매우 협애한 이념적 스펙트럼 속에서 단지 반대의견만을 표명하는 ‘충성스러운 야당’만이 있을 뿐이었다. 학생운동이 중심 축을 민주화에서 중심 축을 담당할 수 있었던 것은, 야당의 역할이 극히 제한된 상황이 만들어낸 소산물이라 하겠다.


민주화에서 노동운동은 무슨 역할을 했나? 노동운동은 학생운동에 부차적으로, 그리고 계기적으로 발생하였다. 냉전 반공주의는 야당을 허약하게 만들고 정치적 반대자들을 억압하는 도구로서 사회 전반에 광범하게 영향을 미쳤다. 노동 역시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중앙집중화된 권력을 필두로 유착한 재벌과 국가는, 강권력을 중심으로 노동을 배제하며 성장 동력을 확보했다. 권위주의 정권은 허약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경제성장이라는 명분이 필요했고, 그것은 철저히 국가가 앞장서서 거대자본을 성장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를 위해서 국가는 자본과 노동의 갈등을 억압할 필요가 있었다. 권위주의 정권 시기 거대하게 성장한 안보기구는 이를 방증한다.  


그것이 가지는 부정적 효과는, 부문 이익이 자신의 이익을 표현하기 위한 적합한 언어를 가지고 조직화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했다는 것이다. 조직화는 곧 국가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거나 혹은 휴전선 너머 이북을 향한 은밀한 음모를 가진 것 쯤으로 의심되었다. 정치학자 박상훈은 자신의 강연을 묶은 저서 『정당의 발견』에서 “’조직화 사건’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게 무척 웃긴 일”이라고도 표현했다. 그만큼 자본과 국가에 적대하는 갈등세력의 존재는 은폐되거나 억압되어 왔고, 그것을 이념적으로 정당화해준 것이 바로 냉전 반공주의라 하겠다.


물론 국가가 거대한 관료체제를 동원해 운동의 발전을 억압한다 하더라도 어디서든 돌출되는 부분은 있게 마련이다. 학생 계층은 이러한 광범한 이데올로기적 공격으로부터, 비록 제한적이지만, 약간의 자율성을 누릴 수 있었다. 근대화의 효과로 인한 교육의 확산은 학생들로 하여금 민주주의의 가치와 이념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만들었고, 여러 담론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이런 과정의 연장선상에서, 재야 지식인, 종교인, 문인 등 교육받은 중산층이 학생운동의 지원세력으로 등장했다. 이러한 배경은 후에 민주화 운동에 가담한 세력 중 일부가 중산층 급진주의―낭만주의―로 후퇴할 것을 예고한다.


운동의 역할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는 두번째 이유는, 민주화 이후 운동세력들이 실제 제도화의 과정을 밟지 못했기 때문이다. “운동을 통해 민주화를 만드는 것과 그 성공의 결과로 민주화가 된 이후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정부를 운영하면서 사회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문제”이다.[각주:33] 4.19 혁명의 구호가 “독재 타도”였다면, 1980년대 민주화의 테제는 권위주의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것으로 변모하였다. 요컨대, 민주주의가 일거에 모든 사회의 문제를 해소시켜주리라는 낭만적 기대감이 민주화 시기에 만연했다. 이러한 가치정향이 갖는 효과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 끊임없이 ‘민주주의’가 외쳐졌다는 현실과 연결된다. 그 결과 민주화 세력은 민주화 이후 실제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과정에 있어 긍정적인 영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무기력해졌다. 최장집은 이렇게 말한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민주화 운동 세력이 민주주의의 가치와 이념에 부응하는 대안적 정당을 건설하는 데 실패하면서 정치적으로 분해되었다는 데 있었다.”[각주:34]


야당은 민주화 시기에 대안정부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민주화 이후에는 조만간 야당이 정부를 구성하게 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민주화의 결과로서 야당이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는 것과, 새로이 선출된 정부가 좋은 정책을 통해 바람직한 사회경제적 결과를 만들어나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민주주의는 그 어떤 좋은 결과물도 보장하지 않는다. 새로이 선출된 정부가 유능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좋은 사회경제적 결과물을 산출해내지 못한다면 많은 투쟁과 희생을 통해 얻어낸 민주화에 대한 기대감은 한순간에 실망감으로 바뀌게 된다.


민주화가 일단 성공하고 나면, 운동에 참여한 집단은 탈동원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구체제를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거대하게 동원된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운동을 주도한 집단들은 운동이 지향한 비전과 가치를 통해 대안적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러한 탈동원화 과정에서 운동세력이 실제로 민주적 규범에 부응하는 대안정부로서 성장하지 못했다. 민주화를 진행하며 야당은 ‘민주주의’를 대표하게 되었다. 비록 진정한 의미에서의 야당은 재야에서 등장했지만, 정치적 민주화의 제도적 달성을 위해서 야당의 존재는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민주화의 결과물은 집권 세력과 야당 간의 협약으로 진행되었다. 이는 민주화의 첫번째 요구인 정치적 민주화의 제도적 달성을 목표한 것이면서도, 동시에 운동 세력이 배제된 채 정치 엘리트 사이의 협약으로 이루어졌기에 ‘절반의 혁명’이라 부를 만 하다. 민주주의는 정치적 대표의 체계화 사회의 갈등 · 균열 구조가 일치할 때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엘리트 사이의 협약으로 진행된 민주화는 정치적 대표체제와 사회의 갈등구조가 일치하지 않는, 초기 냉전이 만들어낸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1) 한국은 냉전 반공주의의 영향 아래 협애한 이념의 체계 아래에서 형성된 보수적 정당 체계를 구성했다. (2) 냉전 반공주의의 영향 아래 시민사회는 노동이 배제된 채 조직화의 기회를 박탈당해왔다. (3) 한국의 민주화는 야당이 대안정부로서의 기능을 못하는 상황에서 학생 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4) 여러 좌절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민주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적 수용은 이후 민주화 세력으로 하여금 민주화 이후 실제 정치과정에 참여하는 데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5) 따라서 민주화 세력은 민주주의적 가치와 이념에 부응하는 대안적 정당을 만듦으로써 제도화하는 데 실패했다. 이들이 정치적으로 분해되면서, 오히려 민주파에 대한 실망감으로 되돌아왔다.


요컨대 한국 정치의 다이내믹스의 원천은 바로 민주화 세력이 대안적 정당을 만드는 데 실패하면서 공중으로 분해된 무정형의 시민들이 개별적으로 정책과 사안에 대해 호오를 표명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거나 보수화된 민주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기성정당이 시민을 조직하지 않고 여론에 기댐으로써 실망과 기대의 사이클이 역동적으로 반복된다는 데 있다. 


이러한 실망과 기대의 사이클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 같다. 첫째, 냉전 반공주의의 영향 아래 성장하지 못한 허약한 시민사회와 협애한 정당 체계는 시민의 참여를 조직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으로 형해화시켰다. 둘째, 강력한 국가는 강력한 대통령을 만들어낸다. 강력한 대통령과 허약한 시민사회가 만들어내는 효과는, 정책 결정 과정을 아래로부터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불균등하게 등장하는 여론의 추이에 따라 이슈가 취사선택됨으로써 하향식으로 조직한다는 것이다. 각각의 요소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허약한 시민사회


민주주의의 기초는 자율적 시민사회의 존재와 그로부터 탄생하는 자율적 결사체들의 존재로부터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시민사회는 어떤 내용과 맥락을 가지는가? 민주주의를 두 개의 수준으로 나누어 분석한다고 했을 때, 하나는 국가의 안정적 운영과 갈등의 제도화라는 측면의 민주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갈등이 제도화되는 과정, 즉 시민사회의 역량과 역할 측면의 민주주의라고 나누어 볼 수 있겠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시민사회의 이상적 형태를 ‘부문 이익의 보호와 증진을 위해 조직된 자율적 결사체들의 다원적 경쟁’이라 정의하자.


그런 점에서 볼 때 한국의 시민사회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조망할 수 있다. 첫 째, 권위주의 시기 한국의 시민사회는 오랜 기간 노동이 배제된 공간으로서 초법적 권력으로 작동하는 자본과 그들을 지원하는 국가권력의 동맹을 중심으로 노동 탄압을 통해 지배권을 획득하고 착취구조를 공고화시켜왔다. 즉, 부문 이익들이 자율적으로 조직되고 경쟁할 수 있는 기회는 국가에 의해 장기간 박탈되었다.


둘째, 그렇다면 민주화 이후 시민사회는 ‘자율적 결사체들의 다원적 경쟁’이라는 내용을 획득했는가? 이에 대한 대답도 역시 회의적이다. 권위주의 정권을 겹치며 오랜 기간 누적된 정치적 피로감―즉 노동 탄압 과정에서 노동조합의 폭력적 저항 등이 언론에 의해 과잉투사되며 부정적 이미지가 형성되고, 나아가 민주화 이후 민주국가에서는 폭력이 더 이상 불필요하다는 인식이 겹쳐지면서 만들어진 효과로서의 피로감―이 조직화에 대한 열망을 감소시켜왔다.


민주화의 효과는 권위주의 시기 성장한 강권력을 해체하지 못했다. 민주화 이후 급격하게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편 과정에서 여전히 강권력은 유효하게 작동했다. 국제 정세 속에서 국가의 경제구조 개편이 다소 간 불가피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민주화 이후에도 노동이 배제되었던 것은 한국의 민주화가 다원주의적이고 자율적인 결사체의 성장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 결과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의 시민사회는 ‘조직 대중’이 아니라 우연적이고 단기적인 열망에 의해 일시적으로 모인 집합으로서 권위주의적 국가와 대적하기 위해 형성된 느슨한 연합의 성격을 강하게 가진다.


이렇게 형성된 한국의 시민사회는, 분명히 존재하기는 하나, 어디까지나 공적 영역에 대한 헌신, 즉 공공선의 추구와 보편적 가치의 수호라는 측면에서 호출되는 ‘적극적 시민’만이 그 호명 대상이 되며 개인의 사적 이익의 추구는 상당히 부정적이고 비도덕적인 것으로 묘사되었다. 요컨대, 한국의 시민사회는 강한 민주주의적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개인의 사적 이익을 조직하고 다양한 갈등관계를 반영하는 다원적 구성은 매우 약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협애한 정당 체계


한국 사회에서 정당은 직능별, 기능별, 직종별 등 사회 내에 산재하는 다양한 열정과 갈등을 봉합하고 그것을 수렴하여 효과적으로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엘리트들에게 크게 유리한 방향으로 특정 갈등(예컨대 지역)을 선별적으로 편취함으로서, 그리고 사회 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운동 세력을 권위주의적 공권력을 통해 효과적으로 억압함으로써 이루어진 보수적 양당 체제라고 말할 수 있다.[각주:35]


한국의 정당 체제는 1950년대 극심한 반공 체제 아래 매우 협애한 이념적 스펙트럼 내에서 경쟁하는 구도에서 탄생하였다. 냉전 체제와 함께 탄생한 반공주의는 정치적 갈등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양분하고 정치적 경쟁을 극한의 적대관계로 바꿔버렸다. 또한 집권자들은 자신의 정권을 보위하고 비판자와 반대자들을 억압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반공주의를 이용할 수 있었다. 그 효과는, 광범한 이념적 분화를 따라 다양한 정치적 경쟁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흑백논리에 따른 양자 택일로 정치를 축소시켜버린 것이었다.[각주:36]


민주적 개방, 즉 절차적 민주주의의 획득 이후에도 한국의 정당 체제는 직능적-계층적 갈등과 열정이 동원될 수 있는 여건에 노출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여전히 한국의 정당 체제를 주형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헤게모니는 반공이었으며, 따라서 이들은 여전히 협애한 이념적 틀 안에서 당도한 선거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또다른 갈등 구조를 반영하게 되었다.


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촉발된 지역 간 갈등 구도는 목전에 이른 선거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정당들이 동원할 수 있었던 가장 손쉬운 정치적 자원이었고, 그 결과가 지역 기반 양당 대결 구도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한국의 지역 정당 체제는 민주적 개방과 더불어 대중 동원이 필요했을 때, 다른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것처럼 정치 갈등의 영역을 전국적으로 최대화하는 계층적, 직능적, 기능적 이익과 균열을 따라 대중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기존 구 정당 체제의 틀 속에서 지역을 수직적으로 분획함으로써 국지화된 갈등 축을 따라 대중을 동원한 결과인 것이다.”[각주:37]


이러한 정당 체제가 대중의 이익과 열정을 효과적으로 제도화하지 못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나아가 이 때 호명되는 “법의 지배”는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기 위한 매개자로서 호출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보수적 헤게모니를 저항세력으로부터 방어하고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 불러들이는 것에 더욱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많은 경우 보수적 정당 체제 하에서 민주파 야당은 이러한 관치적 법질서 아래에서 운신의 폭이 좁을 수 밖에 없었고, 그 영향 아래에서 태동하는 정당정치는 당연히 시민사회와 괴리된 형식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조건 하에서 사회적 기반을 가지지 못한 야당은 무형의 여론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형국을 맞이하였다. 중요한 정치적 국면마다 야당은 대안정부로서 호명되지만, 야당은 실제로 그들이 대안정부가 되었을 때 민주적 가치에 부응하는 결과물을 창출하는 데 실패해왔다. 여론에 따라 지지율이 요동치는 현상은 이러한 구조를 단적으로 나타내준다. 기대와 실망의 사이클이 반복되는 것이다.


강력한 국가


강력한 국가는 강력한 대통령제와 결부된다. 앞서 살펴본 허약한 정당과 협애한 정당 체계, 허약한 시민사회라는 세 개의 축이 강력한 국가를 만난다면 어떤 정치적 현상이 나타나는가? 최장집은 세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한다.[각주:38]


첫째, 대통령의 의지와 의사, 정책 목표 따위가 설정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시민사회의 지배적 여론이 동원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둘째, 시민사회 내에 존재하는 거대이익들이 여론을 조성하고, 그것이 사회적 합의의 형성을 도모할 수 있다. 셋째, 공론장의 숙의를 거치지 않은 특정 이슈가 일시적으로 부상하면서, 특정 집단 또는 다수의 이익과 결합해 중대 이슈로 발전하고 정책화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최장집은 이러한 시나리오가 발생하는 한국 정치의 구조를 두고 “즉응의 정치”(Instant Politics)라고 특징지었다. “시민사회가 국가를 견제하지 못함으로써 강력한 국가를 관장하는 대통령의 권한 내지 권력이 제어되지 않은 채로 발현되는 현상은, 민주주의의 가치와 원리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결과인 동시에 한국 민주주의의 안정적인 작동을 위협하는 요소”이며, “대표만 있고 책임이 따르지 않는 무책임의 정치를 그 중심 요소”로 한다.[각주:39]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자. 한국의 민주주의는 허약한 시민사회, 허약한 정당, 협애한 정당 체계, 강력한 국가와 강력한 대통령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함으로써 만들어내는 것은, 중요한 정치적 국면마다 조직되지 않은 무형의 국민 여론이 부상하고, 특정 여론과 이슈가 권력자들에 의해 취사선택됨으로써 정책결정이 하향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의 개선을 기대하며 대안정부에 투표한 시민들은 사회적 기반을 가지지 못한 허약한 정당에 의해 대표되지 못하고, 나아가 정당 역시 여전히 사회의 갈등구조와 연계되는 정치적 대표 체계를 지니지 못하고 있다. 정당은 사회의 부분을 조직해주어야 하지만, 오늘날 정당들이 '모든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는 것은, 우리 사회의 부분(part)이 무척 약한 결과라 하겠다. 그것은 첫째, 새로이 선출된 민주정부가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는 좋은 사회경제적 결과를 산출해내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둘째, 민주화의 결과로 사회가 좋아질 것이라 기대했던 시민들로 하여금 실망을 자아냈다. 허약한 시민사회는 사회의 다양한 부문이익을 체계적으로 조직하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시민들 개개인은 갈등의 해결에 있어서 공적 영역의 중재를 기대하기보다는 여론정치에 의존하게 되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간단하다. 정당이 사회적 기반을 가지는 튼튼한 정당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당의 역할과 기능이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요하며 또 중요하게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기구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소상히 살펴보았다. 요컨대, 정당 발전 없이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는 없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정당을 강화하고, 정당으로 하여금 우리 사회를 분할 조직하도록 함으로써 다원적 체계를 확보하는 것이 정치적 평등을 확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희망이다.


6. 나가며: 민주주의의 미래


적지 않은 지면을 통해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거칠게 나마 민주주의의 개념적 이해에서 출발하여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분석까지 마무리 지었다. 나의 소견으로는 앞으로 몇 십년은 더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상투적 문구들을 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현실은 결코 밝은 전망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비관할 것은 아니다. 정치는 언제나 가능성의 세계이며,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섣불리 낙관하거나 비관하는 것이 아니라 ‘오답 속으로 뛰어들지 않는’ 지적인 인내심을 기르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체제이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할 수 없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도덕적 기초이다. 대신 민주주의는, 인간을 ‘더 나아질 수 있는 존재’로 받아들인다. 무지몽매하다고 비난하거나, 천성의 문제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는 그들이 배울 수 있는 기회만 있다면 얼마든지 나아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간주한다. 앞서 나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정치적 평등의 위기라고 언급했다. 그리고 정치적 평등을 위협하는 다양한 물질적 조건들을 탐색했다. 그러나 중요한 한 가지를 탐색하지 않았다. 바로 정치적 평등을 떠받치는 도덕적 기초이다. 아직까지 논리적으로 완성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정치적 평등의 위기란 도덕적 위기에 조금 더 가깝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미래는 민주주의가 가진 가능성을 존중하고, 민주주의를 통해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긍정적 미래를 희망하면서 사려 깊은 판단을 잃지 않는 것에 달려 있지 않을까. 종종 페이스북을 볼 때마다 나는 암울함을 느끼곤 한다. 적대자를 향해 험한 말을 하는 것은 기본이고, 상대방을 ‘개돼지’라고 비난하는 것도 심심찮게 보인다. 어느 모로 보나 정치적 양극화가 심각한 수준이 이르지 않았나 싶다. 구체제를 청산해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과도기적 현상일까 하고도 생각해보지만,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존중하는 담론의 장은 여전히 그 폭이 좁기만 한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의 미래는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들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는 언제나 가능의 세계이며,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객관적 조건들이 아무리 절망적이고 비관적인 방향을 가리킨다 하더라도 인간의 역량으로 극복해갈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심지어 민주주의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체제이다.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이라 할지라도, 현실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신중한 희망을 놓치지 않는 것이 민주주의의 미래를 조금은 더 밝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글의 부제인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바로 이런 의미이다.


시간의 한계와 지혜의 부족으로 인해 글의 내용이 일정 부분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넣고 싶었으나 넣지 못한 내용도 있다. 독자 여러분의 너그러운 양해를 바란다. 나의 바람은 꽤 단순하다. 독자 여러분들이 좀 더 민주주의를 깊이 이해하고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옹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7. 참고문헌


E. E. 샤츠슈나이더, 『절반의 인민주권』, 현재호 · 박수형 역, 후마니타스, 2008. print.

데이비드 헬드, 『민주주의의 모델들』, 박찬표 역, 후마니타스, 2010. pr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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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A. 달,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 조기제 역, 문학과지성사, 1999, print.

로버트 A. 달,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On Political Equality), 최순영 역, 후마니타스, 2010. print.

로버트 달, 『경제 민주주의에 관하여』, 배관표 역,  후마니타스, 2011. print.

매튜 A. 크렌슨 · 벤저민 긴스버그,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서복경 역, 후마니타스, 2013. pr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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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던, 『민주주의의 수수께끼』(Setting the People Free: The Story of Democracy), 강철웅 · 문지영 역, 후마니타스, 2015. print

최장집 · 박찬표 · 박상훈. 『어떤 민주주의인가』. 후마니타스. 2017. print

최장집 · 박찬표 · 박상훈 · 서복경 · 박수형. 『논쟁으로서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13. print.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개정2판), 후마니타스, 2010. print.

테렌스 볼 · 리처드 대거, 『현대 정치사상의 파노라마: 민주주의의 이상과 정치 이념』, 정승현 · 강정인 · 김수자 · 문지영 · 오향미 · 홍태영 역, 아카넷, 2006. print.



  1. 이 글은 2018년 5월 3일, 인천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소모임 ‘정경학’에서 18학번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강연의 해제문이다. 강연의 내용을 듣고 조금 더 상세히 알아보고 싶은 청취자들을 위해 쓰여졌다. [본문으로]
  2. 규범적 진술이란 사물이 ‘어떤 상태로 있어야만 하는가’, 즉 당위의 영역을 말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서술적 진술이란 ‘사물이 어떤 상태로 있는가’, ‘왜 그런 상태로 있는가’를 해명하는 영역이다. 모든 서술적 진술은 ‘설명’을 포함하며, 이 때 설명은 반드시 특정한 가치의 개입으로 인해 왜곡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왜곡은 결코 우리의 이해를 가로막는 장벽이 아니라, 이해를 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민주주의를 해명하는 작업은 이 둘 사이의 긴장 속에서 위태롭게 외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다. [본문으로]
  3. 민주주의의 이상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하라. 테렌스 볼 · 리처드 대거, 「제 2장: 민주주의의 이상」, 『현대 정치사상의 파노라마: 민주주의의 이상과 정치 이념』, 정승현 · 강정인 · 김수자 · 문지영 · 오향미 · 홍태영 역, 아카넷, 2006. print. pp.45-90 [본문으로]
  4. 고대 아테네에서 데모스는 ‘모든 사람’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종종 ‘보통 사람’ 혹은 ‘가난한 사람’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로버트 A. 달, 『민주주의』(On Democracy), 김왕식 · 장동진 · 정상화 · 이기호 역, 동명사, 1999. print. p.28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5.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다음을 참조하라. 데이비드 헬드, 『민주주의의 모델들』, 박찬표 역, 후마니타스, 2010. print. pp.41-42; Aristotle, The Politics, 362-364 참조. [본문으로]
  6. 이상의 내용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하라. 로버트 A. 달, 『민주주의』(On Democracy), 김왕식 · 장동진 · 정상화 · 이기호 역, 동명사, 1999. print. pp.56-59; 혹은 훨씬 간결하고 요약적으로 설명하는 문헌을 보고 싶다면 다음을 참조하라. 로버트 A. 달,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On Political Equality), 최순영 역, 후마니타스, 2010. print. pp.20-22 [본문으로]
  7. 플라톤의 ‘항해사의 비유’와 그에 대한 자세한 해제는 다음을 참조하라. 데이비드 헬드, 『민주주의의 모델들』, 박찬표 역, 후마니타스, 2010. print. pp.54-58 [본문으로]
  8. 예를 들어, 정치인들의 선의를 믿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정치인들이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들의 행위가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수호자주의 역시 같은 맥락에서 권력의 독점을 정당화한다. 즉 수호자들이야말로 통치에 가장 적합한 자질을 가지고 있고, 이들이 공공선에 대해 공평하게 고려할 수 있는 ‘선의’를 가지고 있다면 정치를 통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이것에 대해 정면으로 반대한다. [본문으로]
  9. 이상의 내용은 로버트 A. 달,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On Political Equality), 최순영 역, 후마니타스, 2010. print. pp.16-17을 참조하라; 혹은 수호자주의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이며 사려 깊은 비판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로버트 A. 달,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 조기제 역, 문학과지성사, 1999, print. pp.138-165; 로버트 A. 달, 『민주주의』(On Democracy), 김왕식 · 장동진 · 정상화 · 이기호 역, 동명사, 1999. print. pp.99-113 [본문으로]
  10.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증은 다음을 참조하라. 로버트 A. 달, 『민주주의』(On Democracy), 김왕식 · 장동진 · 정상화 · 이기호 역, 동명사, 1999. print. pp.69-86. [본문으로]
  11. 존 던, 『민주주의의 수수께끼』, 강철웅 · 문지영 역, 후마니타스, 2015. print. pp.126 [본문으로]
  12. 규모에 따른 딜레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로버트 A. 달, 『민주주의』(On Democracy), 김왕식 · 장동진 · 정상화 · 이기호 역, 동명사, 1999. print. pp.144-147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13. J. S. 밀에 대한 자세한 해제는 다음을 참조하라. 데이비드 헬드, 『민주주의의 모델들』, 박찬표 역, 후마니타스, 2010. print. pp.163-190 [본문으로]
  14. 로버트 A. 달, 『민주주의』(On Democracy), 김왕식 · 장동진 · 정상화 · 이기호 역, 동명사, 1999. print. pp.130-131; John Stuart Mill, Consideration on Representative Government[1861](New York: Liberal Arts Press, 1958), 55 [본문으로]
  15. 로버트 A. 달, 『민주주의』(On Democracy), 김왕식 · 장동진 · 정상화 · 이기호 역, 동명사, 1999. print. pp.120-121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16. 이것은 아테네의 장군이었던 페리클레스의 연설문 중 한 구절이다. 페리클레스의 장송연설은 길게 인용할 만한 가치가 있는데, 자세한 것은 다음을 참조하라. 데이비드 헬드, 『민주주의의 모델들』, 박찬표 역, 후마니타스, 2010. print. pp.36-38; Thucydides, The Peloponnesian War, 145-147 [본문으로]
  17. 『연방주의자 논집』은 국내에 번역되어 출판되어 있다. 매디슨이 저술한 No.10의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다음을 참조하라. 알렉산더 해밀턴 · 제임스 매디슨 · 존 제이, 『페더랄리스트 페이퍼』, 김동영 역, 한울, 1995. print. pp.61-68 [본문으로]
  18. 제임스 매디슨의 견해에 대한 보다 자세한 해제는 다음을 참조하라. 데이비드 헬드, 『민주주의의 모델들』, 박찬표 역, 후마니타스, 2010. print. pp.146-155 [본문으로]
  19. 샤츠슈나이더의 주장에 대한 간략한 해제는 다음을 참조하라. 박상훈, 『정치의 발견』(개정 3판), 후마니타스, 2015. print. pp.119-146; 혹은 샤츠슈나이더의 주장에 대해 더욱 깊게 알아보고 싶은 독자는 다음의 책을 참조하라. E. E. 샤츠슈나이더, 『절반의 인민주권』, 현재호 · 박수형 역, 후마니타스, 2008. print. [본문으로]
  20. 여기에서 정치의 기본적인 구조가 ‘집단’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하겠다. 공적 의제든, 혹은 사적 의제이든 ‘사회적 수준’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이들은 집단을 구성한다. 뿐만 아니라 사회의 여러 부분은 필요에 따라, 혹은 선호나 이익에 따라 여러 크고 작은 집단으로 분화되어 있다. 가정, 동아리, 학교, 기업, 시민단체……. 정치 역시 마찬가지로 이런 집단의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 [본문으로]
  21. E. E. 샤츠슈나이더, 『절반의 인민주권』, 현재호 · 박수형 역, 후마니타스, 2008. print. pp.41-62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22. 균열 이론에 대한 소개는 다음을 참조하라. Seymour M. Lipset and Stein Rokkan, “Cleavage Structure, Party Systems and Voter Alignments : An Introduction”, Lipset and Rokkan eds., Party Systems and Voter Alignments(New York: Macmillan, 1967) [본문으로]
  23. 로버트 A. 달,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On Political Equality), 최순영 역, 후마니타스, 2010. print. pp.80-84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24. 정치적 자원이란 돈, 정보, 시간, 이해력, 인맥, 직업 등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한 유무형의 모든 자원을 뜻한다. 정치적 자원은 언제 어디서나 불균등하게 분배된다. 그리고 불행히도, 이것은 정치적 평등을 위협하는 아주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본문으로]
  25.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세계화의 결과로 국가는 약해지고 있으며, 전 지구적 시민사회가 등장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본 글에서 다루기에는 너무나 광범한 주제이므로 여기에선 다루지 않기로 하자. 다만 관심 있는 독자를 위해 참고할 만한 저술 한 권을 소개한다. 존 베일리스·스티브 스미스·퍼트리샤 오언스, 『세계정치론』(6th Edition), 하영선 외 역, 을유문화사, 2015, pp.426-445 [본문으로]
  26. 매튜 A. 크렌슨 · 벤저민 긴스버그,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서복경 옮김, 후마니타스, 2013. print. pp.7-12 [본문으로]
  27. 슘페터의 주장과 그에 대한 비판은 다음을 참조하라. 데이비드 헬드, 『민주주의의 모델들』, 박찬표 역, 후마니타스, 2010. print. pp.274-304. [본문으로]
  28. 달의 주장에 대한 자세한 해명은 다음을 참조하라. 데이비드 헬드, 『민주주의의 모델들』, 박찬표 역, 후마니타스, 2010. print. pp.306-319 [본문으로]
  29. 데이비드 헬드, 『민주주의의 모델들』, 박찬표 역, 후마니타스, 2010. print. pp.327-333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30. E. E. 샤츠슈나이더, 『절반의 인민주권』, 현재호 · 박수형 역, 후마니타스, 2008. print. p.83 [본문으로]
  31.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개정2판), 후마니타스, 2010. print. pp.117-151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32.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개정2판), 후마니타스, 2010. print. pp.79-80 [본문으로]
  33. 최장집 · 박찬표 · 박상훈 · 서복경 · 박수형. 『논쟁으로서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13. print. pp.81-90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34. 최장집 · 박찬표 · 박상훈 · 서복경 · 박수형. 『논쟁으로서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13. print. p.175 [본문으로]
  35.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가 민주주의의 갈등구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의한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장집 교수의 전문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샤츠슈나이더는 정치 엘리트들이 한 사회의 지배적 사회 갈등을 배제하고 자신들의 당선과 재선에 유리한 갈등만을 선택적으로 동원하는 행태를 '갈등의 사유화(privatization of conflict)'로 개념화했다. 그러면서 노동문제와 같이, 한 사회의 중심적 갈등들이 정당을 통해 전국화될 때 비로소 지역 정당 체제와 같이 정치 엘리트들에 의해 사유화되고 전치된 정치 갈등의 구조는 변화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정당 경쟁을 통해 한 사회의 중심적 갈등이 배제되지 않고 사회화될 때 낡은 정치적 행태들은 변화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중요하지만 억압되어 있던 이슈들이 정치 경쟁에 들어오게 될 때, 그래서 기존의 정당들이 이를 무시할 경우 새로운 정당이 용이하게 만들어질 수 있게 될 때, 보수적 정당 간의 끝없는 저질 경쟁은 멈추도록 강제될 것이다. 이를 통해 정당 경쟁이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내용을 갖게 될 때 정치가 언론에 종속되는 것도 지양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정당은 대중적 참여는 없고 서로 구분되는 특정의 이념과 대안을 갖지 않는 정치 엘리트들의 카르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지 않으려면 정당은 사회적 갈등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대중적 다수를 만들기 위해 경쟁적인 정치적 대안을 동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념과 정책을 갖는 대중정당으로 당의 성격이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정치적 대표 체제에서 대중주권이 실현될 수 있고 투표에 참여하고자 하는 욕구도 커질 것이다."(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개정2판), 후마니타스, 2010. print. pp.257-258) [본문으로]
  36.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개정2판), 후마니타스, 2010. print. p.80 [본문으로]
  37.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개정2판), 후마니타스, 2010. print. p.133 [본문으로]
  38. 최장집 · 박찬표 · 박상훈 · 서복경 · 박수형. 『논쟁으로서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13. print. pp.45-46 [본문으로]
  39. 최장집 · 박찬표 · 박상훈 · 서복경 · 박수형. 『논쟁으로서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13. print. pp.46-4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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