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4월 경에 쓴 글이다.
본문 중 발췌
pp.10-11
오늘날 민주주의는 그렇게 죽어가고 있다. 파시즘과 공산주의, 혹은 군부 통치와 같은 노골적인 형태의 독재는 전 세계적으로 점차 종적을 감추고 있다. 최근에는 군사 쿠데타를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의 폭력적인 권력 장악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의 국가가 정기적으로 선거를 치른다. 그럼에도 민주주의는 다른 형태로 죽어간다. 냉전이 끝나고 민주주의 붕괴는 대부분은 군인이 아니라 선출된 지도자의 손에서 이뤄졌다. (…) 오늘날 민주주의 붕괴는 다름 아닌 투표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p.13
민주주의 기반이 아무리 튼튼하다 해도 극단주의 선동가는 어느 사회에서나 등장하기 마련이다. (…)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시험은 이러한 인물이 등장하는가가 아니라, 정치 지도자와 정당이 나서서 이러한 인물이 당내 주류가 되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이들에 대한 지지와 연합을 거부하고, 필요하다면 다른 당의 민주주의 후보자를 지지하거나 경쟁 세력과 적극적으로 연대함으로써 이들이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가이다.
p.15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돌아가고 오랫동안 이어지기 위해서는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이 헌법을 뒷받침해야 한다. 지금까지 두 가지 기본적인 규범이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미국 사회의 견제와 균형을 유지해왔다. 그 두 가지 규범이란 정당이 상대 정당을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상호 관용mutual toleration과 이해understanding, 그리고 제도적 권리를 행사할 때 신중함을 잃지 않는 자제forbearance를 말한다.
p.29
잠재적 대중선동가는 모든 민주주의 사회에 존재하며, 때로 그들은 대중의 감성을 건드린다. 그러나 어떤 사회에서는 정치 지도자들이 경고신호를 인식하고, 이러한 인물들이 권력의 중앙무대로 올라서지 못하도록 방어한다. 극단주의자나 선동가가 대중의 인기를 얻었을 때 기성 정치인들은 힘을 합쳐 그들을 고립시키고 무력화한다. 물론 극단주의자의 호소에 대한 대중의 반응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치 엘리트 집단, 특히 정당이 사회적 거름망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가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정당은 민주주의의 문지기gatekeeper인 셈이다.
p.32
민주주의 규범에 대한 거부(혹은 규범 준수에 대한 의지 부족) | - 헌법을 부정하거나 이를 위반할 뜻을 드러낸 적이 있는가? - 선거제도를 철폐하고, 헌법을 위반하거나 정부 기관을 폐쇄하고, 기본적인 시민권 및 정치 권리를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는가? - 권력을 잡기 위해 군사 쿠데타나 폭동, 집단 저항 등 헌법을 넘어선 방법을 시도하거나 지지한 적이 있는가? - 선거 불복 등 선거제도의 정당성을 부정한 적이 있는가? |
정치 경쟁자에 대한 부정 | - 정치 경쟁자를 전복 세력이나 헌법 질서의 파괴자라고 비난한 적이 있는가? - 정치 경쟁자가 국가 안보나 국민의 삶에 위협을 주고 있다고 주장한 적이 있는가? - 상대 정당을 근거 없이 범죄 집단으로 몰아세우면서, 법률 위반(혹은 위반 가능성)을 문제 삼아 그들을 정치 무대에서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는가? - 정치 경쟁자가 외국 정부(일반적으로 적국)와 손잡고(혹은 그들의 지시에 따라) 은밀히 활동하는 스파이라고 근거도 없이 주장한 적이 있는가? |
폭력에 대한 조장이나 묵인 | - 무장단체, 준군사조직, 군대, 게릴라, 혹은 폭력과 관련된 여러 조직과 연관성이 있는가? - 개인적으로 혹은 정당을 통해 정적에 대한 폭력 행사를 지원하거나 부추긴 적이 있는가? - 폭력에 대한 비난이나 처벌을 부인함으로써 지지자들의 폭력 행위에 암묵적으로 동조한 적이 있는가? - 과거나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심각한 정치 폭력 행위를 칭찬하거나 비난을 거부한 적이 있는가? |
언론 및 정치 경쟁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려는 성향 | - 명예훼손과 비방 및 집회를 금지하거나, 정부 및 정치조직을 비난하는 등 시민의 자유권을 억압하는 법률이나 정책을 지지한 적이 있는가? - 상대 정당, 시민 단체, 언론에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협박한 적이 있는가? - 과거에 혹은 다른 나라의 정부가 행한 억압 행위를 칭찬한 적이 있는가? |
pp.33-34
주요 정당이 문지기 역할을 잘 해내기 위해서는 극단주의 세력을 고립시키고 억제할 힘이 있어야 한다. 정치학자 낸시 버메오Nancy Bermeo는 이를 일컬어 ‘거리두기distancing’라고 표현했다.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정당은 여러 방식으로 거리두기를 실행할 수 있다. 첫째, 잠재적인 독재자를 선거 기간에 당내 경선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정당 지도자는 선거에서 이길 가능성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극단주의자를 고위직 후보자로 공천하려는 유혹을 떨쳐내야 한다.
둘째, 정당의 조직 기반에서 극단주의자를 제거하는 것이다. (…)
셋째, 반민주적인 정당이나 후보자와의 모든 연대를 거부함으로써 거리두기를 할 수 있다. (…)
넷째, 극단주의자를 체계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극단주의자가 유력 후보자로 떠오를 때 주요 정당들은 연합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 린츠의 말을 빌리자면, “이념적으로 멀다고 해도 민주주의 질서를 지키기 위한 강한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상대 정당과 연합할 수 있어야 한다.”
p.87
‘집단적 포기collective abdication’, 다시 말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인물에게 권력을 넘기는 행동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잠재적 독재자를 통제하거나 길들일 수 있다는 착각이다. 둘째, 사회학자 이반 에르마코프Ivan Ermakoff가 ‘이념적 공모ideological collusion’라고 부른 개념으로, 이는 집단적 포기를 택한 주류 정치인들의 이해관계가 잠재적 독재자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지는 경우에 해당된다.
p.118
민주주의가 죽어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한 가지 중요한 아이러니는 민주주의 수호가 때로 민주주의 전복의 명분으로 활용된다는 사실이다. 잠재적 독재자는 자신의 반민주적 조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경제 위기나 자연재해, 특히 전쟁과 폭동, 테러와 같은 안보 위협을 구실로 삼는다.
p.120
대부분의 헌법은 국가 위기 시 행정부 권한의 확대를 허용하고 있다. 덕분에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은 전시에 쉽게 권력을 강화하고 시민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집중된 권력이 잠재적 독재자의 손에 넘어갈 경우, 상상하기 힘든 사태가 벌어진다. 비판자에게 공격을 받고 민주주의 제도가 행보의 걸림돌이 된다고 느끼는 선동가에게, 위기란 비난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정적의 힘을 빼앗을 기회다. 선출된 독재자는 실제로 이러한 위기를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
p.131
모든 성공적인 민주주의는 비공식적인 규범에 의존한다. 비록 이러한 규범은 헌법이나 법률에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지만, 시민사회에서 널리 존중받는다. 특히 미국 민주주의에서 규범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p.132
규범은 개인의 성향을 초월한 것이다. 규범은 정치 지도자 개인의 성향에 의존하지 않으며, 공동체 및 사회 내부에서 널리 공유된, 다시 말해 모든 구성원이 인정하고, 존중하고, 강화하는 행동 규칙에서 비롯된다. 규범은 성문화되어 있지 않으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특히 규범이 제대로 작동할 때에는 더욱 그렇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사람들은 규범의 필요성을 종종 간과한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규범의 가치는 물과 산소처럼 그것이 사라질 때 비로소 드러난다. (…)
그래도 민주주의 수호에 가장 핵심 역할을 하는 두 가지 규범을 꼽자면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institutional forbearace를 들 수 있다.
p.172
이들 규범의 중요성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제도는 다름 아닌 필리버스터다. 앞서 언급했듯이 상원 의원은 1917년 이전에도 필리버스터를 통해 의결 과정을 무기한 연장함으로써 모든 입법을 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상원 의원 대부분 언제나 활용할 수 있는 필리버스터를 “마지막 남은 절차적 무기”로 여겼다. 한 자료에 따르면 19세기 미국에서 있었던 필리버스터는 총 23건에 불과했다.
p.253
(…) 기본 규범에 대한 트럼프의 공격은 용인 가능한 정치 행동의 경계를 넓히고 있다. 우리는 이미 몇몇 결과를 목격하고 있다. 2017년 5월 하원 보궐 선거에 출마한 공화당 후보 그레그 지안포르테Greg Gianforte는 의료보험 개혁과 관련된 질문을 한 <가디언> 기자에게 보디슬램(body slam, 상대를 들어 바닥에 내치는 레슬링 기술-옮긴이)을 가했다. 이로 인해 지안포르테는 경범 폭행죄로 재판에 넘겨졌지만, 그래도 선거에서 이겼다.
p.255
규범은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연성 가드레일이다. 규범이 무너질 때 용인 가능한 정치 행동 범위는 넓어지고, 민주주의를 파멸로 몰아갈 주장과 행동이 시작된다. 예전에는 미국 정치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행동이 이제 고려해볼 만한 전술이 되고 있다.
p.261
(…) 미국은 이제 더 이상 민주주의 모델이 아니다. 대통령이 언론을 공격하고, 상대 후보를 구속시키겠다고 협박하고,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는 더 이상 민주주의를 지킬 여력이 없다.
pp.272-274
그러나 우리 두 저자의 관점에서 볼 때 민주당이 ‘공화당처럼 싸워야 한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첫째, 외국 사례들은 이러한 대응 전략이 오히려 전제주의가 등장할 가능성을 높여주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전면적인 전략은 중도 진영을 위협함으로써 야당의 지지도를 떨어뜨린다. 반면 여당 내 반대파조차 야당의 강경한 태도에 맞서 단결하게 함으로써 친정부 세력을 집결하는 역할을 한다. 게다가 야당이 진흙탕 싸움에 뛰어들 때 정부는 이들을 탄압하기 위한 정치 정당성을 확보한다.
(…) 설령 민주당이 강경 전술을 통해 트럼프를 무력화하거나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다고 해도, 그러한 승리는 상처뿐인 영광이다. 그 이유는 다음 정권이 가드레일이 사라진 민주주의를 물려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간단한 소감
#1 잠재적 독재자의 징후
2017년에 나온 책으로, 민주주의가 권위주의로 후퇴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에 대한 분석을 담은 책. 오늘날 민주주의는 군부나 폭력 사태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선출된 잠재적 독재자들에 의해 무너진다. 정당은 잠재적 독재자들의 등장을 예고하는 징후들은 <표 1>에 요약되어 있다(p.32). 책은 민주주의가 권위주의로 후퇴할 수도 있는 여러 가능성들에 대해 언급하지만, 이 도표가 그 모든 것을 한번에 압축해서 보여준다.
#2 두 가지 규범
두 저자에 의하면 민주주의의 붕괴는 잠재적 독재자들에 의해 민주주의를 지탱해주는 규범들이 공격당함으로써 이뤄진다. 저자들이 꼽는 두 가지 규범은 상호 관용mutual toleration과 제도적 자제institutional forbearance이다(p.132). 상호 관용이란 상대 정당을 적이 아닌 경쟁자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인식이 있어야 타협이 이뤄질 수 있다. 상대 정당을 적으로 인식하게 될 경우 그들을 정치 무대에서 끌어내리고 발언권을 빼앗으려는 열정에 쉽게 추동된다. 그리고 그러한 열정들은 결국 반민주적 조치들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제도적 자제란 비록 무기로 활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예를 들면, 필리버스터)이 있지만 상대 진영과의 극단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스스로 자제하는 것을 말한다. 워싱턴 대통령은, 비록 헌법에 중임 제한 조항이 없었지만 스스로 2회의 임기를 끝마치고 내려왔다. 미국은 헌법에 중임제를 명시하기 전까지, 워싱턴의 선례를 따라 스스로 임기를 2회로 제한해왔다. 영국의 경우 총리의 임명은 왕의 고유 권한이며 특권이다. 그러나 실제로 총리는 하원의 다수당 대표가 맡는 것이 관습이다. 비록 명문화된 어떤 법률도 찾아볼 수는 없지만 왕은 스스로 그것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p.138).
이와 마찬가지로 주요 정당들이 스스로를 충돌을 자제할 수 있을 때 극단주의는 억제되고 민주주의는 유지된다. 민주주의는 법률과 제도로서만 지탱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보이지 않는 규범들에 의해 유지된다. “규범은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연성 가드레일이다”(p.255). 규범들이 존중되었을 때, 미국의 견제와 균형 시스템이 작동할 수 있었다고 두 저자는 말한다.
#3 극단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전복하는 방법
극단주의자들은 주요 정당의 지도자들이 오판함으로써 나타날 수 있다(pp.87-88). 첫째는 극단주의자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단기적 선거 이익에 매몰되어 극단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권력을 얻은 후에 극단주의자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극단주의자들은 쉽게 통제되지 않는다. 둘째는 극단주의자들과 주류 정치인들의 ‘이념적 공모ideological collusion’, 즉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경우이다.
이렇게 넘겨받은 권력을 통해 극단주의자들은 네 가지 전술을 활용하여 민주주의를 합법적으로 전복한다(pp.101-123): (1) 심판(일반적으로, 법원)을 매수하고, (2) 경쟁자를 매수하거나 탄압하고, (3) 운동장을 기울이며, (4) 위기를 조장하고 이를 활용한다. 잠재적 독재자는 “법률을 차별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정적을 처단하고 동지는 보호하는 강력한 무기를 손에 넣”고, 다양한 제도를 바꿈으로써 “저항 세력을 약화하고, 경쟁자에게 불리한 쪽으로 운동장을 기울”이며, “전쟁과 폭동, 테러와 같은 안보 위협을 구실로 삼”아 민주주의를 전복한다.
#4 극단주의 세력은 어떻게 억제되나
정당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들 극단주의 세력을 억제할 수 있다. 공천을 주지 않거나, 조직 기반을 와해시키거나, 연대를 거부하거나, 혹은 체계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이다. 정당은 극단주의 세력의 등장을 눈여겨 보면서 “민주주의의 문지기gatekeeper”(p.29)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조건들이 민주주의에 우호적이지는 않다. 예컨대 경제적 불평등의 확산은 극단주의자들이 활개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제공해준다. 이런 상황에서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극단주의자들과 일시적 동맹을 맺는 유혹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5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나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나? 두 저자는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기 위한 주문으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범세력적 연대를 주장한다. 즉,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시도들을 저지하기 위해, 상대 정당과도 연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두 저자는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라는 두 규범이 무너진 것이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의 핵심이라고 본다. 만약 “똑같이 지저분하게” 싸울 경우, 야당은 정치적 정당성도 잃을 뿐만 아니라, 설령 승리하더라도 그 후대 정권은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가 무너진 민주주의 사회를 물려받게 된다. 그러므로 단호하게 대처해 나가더라도, 최대한 제도적 채널을 활용하여 규범을 무너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6 한국은?
한국의 경우에 대입했을 때 생각해볼 지점이 많다. 나는 요즘 전광훈 목사를 비롯한 극우 개신교 집단의 정치세력화에 관심을 두고 있는데, 이들은 명백히 극단주의 세력이다. 과연 자한당이 이들과 연대할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소한 극단주의 세력을 억제하려는 노력은 아직까지는 찾아보기 어렵다. 민주주의가 극단주의를 억제할 수 있을까?
극단주의자들이 파고드는 민주주의의 약한 고리는 “다양성”이다. 자신의 목소리 역시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 중 하나이며,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다양성은 극단주의자들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양성을 빌미로 규범을 파괴하는 주장들을 재생산한다. 예컨대 극우 개신교 집단은 노골적으로 차별금지법을 반대함으로써, 아무 근거 없이 특정 사회 구성원을 배제하고자 했다. 이들이 주도하는 집회 현장(태극기 집회)은 폭력이 노골적으로 용인된다. 근처를 지나는 시민들을 향해 극언을 서슴지 않고 심지어 일부는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려고도 했다. 지난 탄핵집회 당시에는 군부 쿠데타를 선동하기도 했다. 극단주의 세력 앞에서 관용의 규범은 무력하다.
유튜브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가짜뉴스들은 민주주의적 규범을 위협하는 또다른 약한 고리이다. 유튜브는 이제 대중적인 매체가 되어, 메이저 언론사와 신뢰도를 겨루는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극단주의적 발언을 일삼는 유튜버들이 수십만의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다. 이들은 약자를 조롱하고, 이념적으로 각색된 허위 뉴스를 ‘팩트’라고 부르며 시민들을 현혹한다. 자신들의 이념적 파산과 지적 게으름, 그리고 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저열한 욕망의 배설을 ‘솔직함’으로 포장한다. 진지한 논의와 규범에 대한 존중의 요청은 이들 앞에선 ‘선비질’이 될 뿐이다.
이들이 지닌 마이크의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다. 미국의 정치적 안정은 인종차별을 묵인하는 바탕 위에서 이뤄졌다고 두 저자는 비판한다. 그리고 그것을 반복하는 선택지, 즉 민주당이 “소수민족의 요구를 외면하거나 부차적인 사안으로 치부”함으로써 “노동 및 중산층 백인 유권자 표를 분명히 가져”오는 상황은, “아마도 당파적 양극화를 완화”해줄 지는 모르지만 “끔찍한 발상”이라고 말한다(p.284).
여론은 이런 극단주의적 발언들의 노출로부터 취약하다. 최악의 경우 여론은 잠재적 독재자의 등장을 완전히 지지할 수도 있다. 한국은 유독 여론의 영향이 강력한 만큼(?), 극단주의자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는 장일 수 있다. 한국에서도 트럼프와 같은 인물이 등장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