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사상 초유의 박빙을 보여주었던 대선이 끝났다. 다들 비슷한 이야기를 하겠지만, 그래도 몇 마디 얹어보려 한다. 어차피 주요한 내용들은 다른 훌륭한 분들이 얘기하실테니, 비슷하게 나올 법한 이야기들은 간단하게만 언급하고 몇 가지 쟁점에 대해서 내 생각을 적어보겠다. 두서가 없으므로 양해를 바란다. 어차피 필부필부가 하는 말이므로 딱히 인사이트는 없을 것이다.
먼저 모두가 할 법한 얘기. 이번 대선은 두 가지 점에서 초유였다. (1) 선거 관심도가 굉장히 높았고 (2) 모두의 예상을 깨고 초접전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높은 선거 관심도는 주요 두 후보에 대한 감정적 호오가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어느 책의 제목처럼, "저 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선거였다고 생각한다. 서로에 대한 감정의 골, 심지어 같은 당의 후보에 대한 깊은 감정의 골도 확인했다. 이번 대선은 상대편에 대한 강력한 반대의 동기가 강하게 작용한 선거로 기억될 듯 하다. 지금의 양극화는 이념적-정책적 양극화가 아니라 감정적 양극화라는 점이 보다 분명해졌다고 본다.
초접전을 벌였다는 사실 역시 중요하다. 윤석열의 지지 기반은 그리 탄탄하지 못하다. 즉, 그의 승리는 정말 문자 그대로 절반의 승리이다. 이는 윤석열이 향후 자신의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 나머지 국민의 절반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의 앞에는 민주당이 다수당인 국회가 버티고 있다. 대통령이 워낙 많은 권한을 가진 탓에 종종 왕을 뽑은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현실의 윤석열은 굉장히 많은 제약에 부딪힐 가능성이 높다. 윤석열의 정부는 적어도 민주당이 다수당을 점유하고 있는 시점에서는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정부일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제도적으로는 그러하다. 아울러, 윤석열이 내걸었던 백래시적 공약들도 국내외적 압력에 의해 실행되기 어려울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상황에서는 가장 온건한 변론을 지지하는 편이다. 사건을 온건하게 바라보는 것은 꽤 유용하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선을 두고 (민주당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절망하기 보다는 민주당의 독주에 대한 견제구 정도로 바라보는 것이 대선 이후를 생각하는데에 보다 유용하리라고 본다. 윤석열을 뽑은 사람들이 악마는 아니다. 그렇다고 탐욕에 찌든 인간들도 아니다. 그들 역시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고, 많은 숙고를 거쳤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낫다. 적어도 '동료시민'으로 생각한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본다. 윤석열을 뽑았다는 사실 하나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나타내주지는 않는다는 아주 간단한 사실을, 다들 자주 망각하는 것 같다.
이 정도까지가 현재 대선에 대한 대략적인,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는 정도의 감상일 것이다. 이제 몇 가지 쟁점들(?)이 남아 있다. 어쩌면 이미 다른 분들이 훌륭한 분석을 내놓았을 수 있다. 대략 다음의 네 가지 정도로 압축되는 것 같다. 각각의 주제에 대해 차분히, 그러나 매우 얕게 이야기해보려 한다. 학술적인 내용이라기보다는 약간은 정치공학적인 내용에 가깝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주시기를.
- 이준석은 몰락할 것인가? 부활할 것인가?
- 젠더갈등은 주요한 균열cleavage이 되었는가?
- 향후 5년간 백래쉬가 있을 것인가?
- 이재명은 후보가 되지 말았어야 했나?
#1. 이준석은 몰락할 것인가?
이준석은 몰락할 것인가? 평가는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이준석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쪽에서는 이준석이 아니었다면 윤석열의 지지율이 이렇게 올라올 수 없었으므로 이준석에게 공이 크다고 본다. 반대로, 이준석의 소위 '세대포위론'이 딱히 현실에 부합하지 않고 나아가서는 그 동안 여성표를 무시해온 행보로 말미암아 여성표를 크게 잃었다는 점을 들어 이준석의 정치적 책임을 묻는 사람들도 있다.
윤석열의 지지율이 올라온 것이 과연 이준석의 공이었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알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이준석의 역할도 분명 있었을 것이지만, 동시에 대통령 선거는 애초부터 국회의원선거와 더불어 대중의 관심이 상당히 높은 선거다. 더불어 이재명에 대한 반대(의 정서)가 상당히 높은 강도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이 역시 고려해야 할 대상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이준석이 '결정적 역할을 했는가?'라고 물어본다면,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두번째로 검토할 것은 이준석의 세대포위론이다. 더도 덜도 말할 것도 없이 세대포위론은 작동하지 않았다. 2030이 4050을 포위하는 사태는 전혀 벌어지지 않았다. 또한, 이준석의 그간 행보로 말미암아 여성표에서는 오히려 '압도적으로' 이재명에게 밀렸다. 여성표를 압도적으로 잃어버린 것에 대해 이준석이 결정적 책임이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쪽이 오히려 'yes'라고 대답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윤석열이 앞으로 신경써야 할 것은 20대 여성의 표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신경쓰기 위해서는 이러한 상황을 만든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타겟은, 이준석이 될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간단히 말해, 윤석열의 승리에 이준석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가, 라는 물음에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윤석열이 잃어버린 여성 득표율과 함께 실패한 세대포위론에는 분명한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이준석 자체가 젊은 정치인으로서 비교적 현대적인 언어를 구사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이준석이 구사한 레토릭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유권자의 절반을 사실상 적으로 돌려가면서 만들어낸 승리였기에 더욱 그렇다.
향후 이준석이 부활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적어도 나이라는 장벽에서 그는 비교적 자유롭다. 또한, 윤석열을 어쨌든 당선은 시켰으므로 그 공을 인정받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준석과 같은 부류들이 메인스트림이 되었을 때에는 조금 더 피곤한 사회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인 희망으로는, 이준석 같은 정치인은 다시는 보지 않았으면 한다.
#2. 젠더 갈등은 주요한 균열cleavage이 되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잘 모르겠다." 분명히 20대 남성은 윤석열에게 압도적 표를 주었지만, 그것이 젠더 갈등 때문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바꿔 말해, 젠더 갈등을 해결한다면 20대 남성의 표는 돌아오는가? 가장 보수적으로 대답해서 나는 '알 수 없다'가 현재로서는 정답이라고 본다. 한 사회의 어떤 갈등conflict이 균열cleavage이 된다는 것은 해당 갈등을 주요한 이슈로 삼아 갈등을 어떻게든 봉합하지 않는다면 사회가 분리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젠더 갈등이 우리 사회에 분리주의적 충동을 야기할 정도로 핵심적 균열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일부 극단주의적 분파들은 있었으나, 그들의 세력화(여성의당)는 실패한 것으로 잠정적인 결론이 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젠더 갈등은 사회의 주요한 균열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아직은 잘 모르겠다. 20대라는 렌즈만 놓고 본다면 분명한 차이가 드러난 듯 싶지만,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에는 20대 안에서의 갈등이 과대대표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특히, 여기서 사용되는 '젠더 갈등'이라는 용어 자체가 함축하고 있는 것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동등한 대결이 아니라 잠정적으로 '남성에 대한 여성의 공격'이라는 차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드러난 사실만 놓고 본다면 한국 사회의 성 격차gender gap는 상당히 심각한 수준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윤석열이 이러한 사실을 대놓고 무시하며 정책을 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 이코노미스트가 내놓은 '유리천장 지수glass-ceiling index'( https://www.economist.com/graphic-detail/glass-ceiling-index)는 한국을 꼴찌로 기록한다. 당연히, 국내외적으로 이러한 보고들이 지속적으로 올라올 것이고 내부적으로도 여성들이 윤석열이 아닌 이재명에게 압도적으로 표를 준 상황이므로, 소위 이대남들의 분노라는 것은 여성가족부를 해체하는 정도에서 동력을 잃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남성에 대한 여성들의 공격'이라는 차원에서의 젠더갈등은,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지표들과는 정반대를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언제나 최악을 예비하는 것이 좋다지만, 적어도 현재 시점에서 가장 보수적으로 해석해도 젠더 갈등이 일종의 균열로서 받아들여지는 집단은 상당히 한정적인 것 같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감정적 양극화가 비교적 심각하게 벌어진 상황이라면 향후 이 갈등이 정말 균열로서 발전할지도 모르겠다. 젠더 문제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것을 읽어본 것은 아니기에 더더욱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커뮤니티 속의 여론을 과대포장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는 생각이다.
미래가 어떻게 될진 아무도 모르지만, 여성 정책이 어때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커뮤니티 속에서의 키보드 배틀로 남는 한 상대에 대한 증오를 동원하는 것이 갈수록 더 용이한 환경이 조성될 것 같다. 여성 뿐 아니라 외집단outgroup에 대한 증오를 동원하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 될 수 있고, 더 심각해질 수도 있다. 이를 어떻게 완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중점이 되면 좋겠다.
#3. 윤석열의 당선으로 말미암아 향후 5년간 백래쉬가 예상되는가?
윤석열 당선을 여성혐오의 승리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다. 나는 절반 정도는 동의한다. 여성가족부 폐지부터 시작해서 각종 여성정책은 상당한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비록 현실에서 보이는 지표를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고는 해도, 지도자와 더불어 그 주변의 구성원들이 이를 가볍게 무시해버릴 수 있는 상황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쓸데없이 점쟁이 놀이 좀 하자면, 두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어쨌든 이번 선거는 신남성연대를 비롯하여 극단주의 세력이 상당한 발언권을 얻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이들은 단순히 선거 외적으로 압력을 행사한 것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네트워킹을 이루어냈다. 다음 수순은 이들이 본격적으로 정부에 진출하는 것이다. 주요 정부 요직에 진출하여 각종 여성정책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종종 터져나올지 모르는 여성들의 집단적 항의에 대해 정치폭력을 서슴지 않는 유겐트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동원한 증오를 발판으로 삼아 차기 국회에 도전할 수도 있다. 이미 선거 자체가 여성에게 적대적인 레토릭을 취하면서 이루어졌으므로, 향후 이들의 활동은 자신감을 얻어 더욱 두드러질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백래쉬는 아주 강력하게 일어날 것이다.
둘째는 그나마 좀 나은 경우이다. 이제 선거에서 이겼으므로 신남성연대와 같은 극단주의자들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다. 앞으로는 여성들을 달래줄 만한 괜찮은 정책을 내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하고, 그를 위해서 신남성연대와 같은 극단주의자들은 과감히 숙청한다. 윤서인과 같이 대중적으로 지탄받는 인물 역시 전부 쳐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적어도 대중적으로는 보다 온건하게 비춰질 수 있다. 이럴 경우, 백래쉬는 생각한 것만큼 그렇게 강하게 오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저런 견제장치들도 고려해야 하고, 여성들 표를 생각해야 하므로 정말 마법처럼 윤석열이 일을 잘해낼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다.
이전보다 여성정책이 후퇴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전면적인 백래쉬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는 것도 과도해보인다. 가능성은 열려있다. 윤석열을 옭아매는 견제장치들이 작동할지, 아니면 그를 둘러싸고 있는 유겐트들의 주류화를 목도할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당분간은 조금 피곤해질 것이다.
#4. 그래서 이재명은 후보가 되면 안되었나?
조금 민감할 수 있는 주제이지만, 이재명을 지지했는가 아닌가를 떠나서 나는 이러한 논쟁 자체가 당의 존재 이유를 단순히 팬클럽 정도로 격하시키는 논쟁이라고 생각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러한 종류의 주장들에 동의하기 어렵다. 이재명 자신이 리스크가 큰 인물이라는 점은 동의하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에는 그래도 당이 우선이다. 당이 결정했으면 따르는 것이 원칙이 되어야 한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정당의 당원들이 갖춰야 할 제1덕목은 복종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니,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한다는 사람들이 윤석열을 지지하는 웃지 못할 상황들이 벌어지게 됐다고 생각한다.
정당의 운영이 반드시 민주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건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면 된다. 중요한 건 당원들이 당이 내세우는 중요한 가치에 얼마나 충성하는가이다. 당원들이 충성해야 할 것은 당 그 자체가 되어야지, 개인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개인에게 충성하는 인간은 반드시 분리주의적 열정에 추동되기 쉽다. 그리고 그러한 열정들은 당을 내분상태로 빠뜨린다.
하나의 정당이 내분상태에 빠졌다는 것은 결코 좋은 신호가 아니다. 그건 의사결정구조가 망가졌다는 신호나 다름없다. 말하자면 두 개의 태양이 생긴 셈이다. 특정 정치인 개인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청렴하고 능력 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 개인에게 충성하는 당원들이야 자신의 후보가 더욱 '자격이 있다'라고 생각하겠지만, 후보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결정하는 것은 당이다. 후보를 결정하고 선거에 내보내는 것이 정당이 가진 가장 최고의 기능 중 하나이다.
이재명이 경선에서 승리하면 안되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런 주장들에 담긴 뜻도 이해한다. 이미 지난 마당에 뭘 더 따져서 의미가 있나.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향후에는 당의 결정에 불복하는 이들이 없기를 바랄 따름이다. 그리고 민주당이 보다 권위적인 결정들을 내릴 수 있는 구조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은 든다. 적어도, 개인이 아닌 당에게 충성하는 당원들을 길러낼 수는 있어야 할 것 같다. 쉽진 않겠지만…
#5. 끝으로…
어쨌거나 선거는 끝났다. 개인적인 답답함들을 씻어내기 위해 써내려간 글이라, 딱히 인사이트는 없다. 그냥 길고 재미없는 글이 됐다. 이토록 감정적인 선거가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다만 염려가 되는 것은 앞으로 상대 세력에 대해 출구가 없는 치킨게임만이 반복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것도, 정치인들 사이에서 보이는 게 아니라 유권자들 사이에서의 치킨게임. 치킨게임의 끝은 공멸이다. 여기에 적절하게 제동을 걸어줘야 하는데, 그걸 과연 누가, 어떻게 할까.
모쪼록, 선거하느라 다들 고생들 많으셨다. 누군가는 승리를 안고, 누군가는 패배의 쓴 잔을 기울이겠지만, 다들 정말 고생 많으셨다는 말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