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에서 우리는 Democratic Backsliding을 겪고 있는가? 에 관한 노트. 지난 번 세미나 주제가 Democratic Backsliding이었는데, 관련해서 토론을 짧게 한 뒤 생각난 것들을 정리해봄.
#1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Backsliding이라는 개념이 나온 배경을 이해하는 것. 민주주의의 후퇴, 혹은 퇴행 정도로 번역이 될텐데 이는 민주주의가 권위주의로 퇴행하는 Democratic Breakdown과는 조금 다른 개념.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정부 주도로 민주주의를 제도적, 기능적으로 퇴행시키는 현상을 부르기 위해 나온 개념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음. 다시 말해 backsliding은 체제 전환기의 특성이 아닌, 체제 전환기로 가는 '경로'를 설명하려는 데 있음. 체제 전환을 유도하는 변수들에 대한 설명이 아닌, 체제 전환으로 가기까지 내부적으로 어떤 침식과정이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것.
#2
무엇을 Democratic Backsliding이라 부를 것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합의된 기준은 없음. 개념적으로는 민주주의 안에서 민주주의의 질을 퇴행시키는 모든 행태를 backsliding이라 부를 수 있음. 대체로 공통적으로 지적되는 것은 사법부의 독립성 훼손, 시민사회와 언론에 대한 공격, 입법부를 우회한 행정부의 확대, 전략적인 선거 조작, 경쟁자에 대한 폭력 용인 등이 있음(Bermeo, 2016; Lust & Waldner, 2015, 2018; Levitzky & Ziblatt, 2018).
#3-1
Democratic Backsliding은 여전히 이론적으로는 취약한데, 왜냐하면 기존에 체제 전환을 설명하는 숱한 이론들이 backsliding을 설명하기에는 경험적 분석이 난망하기 때문. 체제 전환기에 놓여있는 국가들은 empirically 분석해볼 수 있지만 내부 침식과정에 있는 국가들은 방법론적으로 분석이 어려움. 예를 들어, 특정한 정치제도를 가진 국가가 backsliding에 더 취약하다는 가설을 세웠다고 치자. 이 때 중요한 것은 제도가 작동하는 과정과 결과. 그러나 강력한 정치 행위자는 제도를 자신들의 선호에 맞게끔 조작할 수 있음. 그렇다면 제도의 효과와 정치행위자의 선호를 분리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는 방법론적으로 매우 어려운 분석. 체제 전환은 분명하게 구분될 수 있으므로 비교적 분석이 용이하지만, backsliding은 침식 '과정'이라는 점에서 분석하기 어렵다는 문제(Waldner & Lust, 2018).
#3-2
또 무엇을 '민주주의'로 볼 것이냐의 문제 역시 여기에 포함. 예를 들어 대통령제 하에서 대통령이 권한을 확대하는 것을 backsliding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이는 매우 논쟁적인 사안일 수 있음. 삼권분립의 훼손, 침식이라는 차원에서는 backsliding이라고 볼 수 있겠으나 제도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대통령의 리더쉽 스타일이 반영되는 것일 수 있음. 가령 국내반발이 클 것으로 예상되지만 대국적 차원에서 맺어야 하는 외국과의 조약 같은 경우 대통령은 국내정치를 우회할 수 있음. 요컨대 backsliding은 제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를 '통한' 침식 행위이고, 이는 해석의 문제를 안고 있다는 점을 유념.
#4
명백히 backsliding이라 부를 수 있는 다수의 케이스.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튀르키예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헝가리의 경우 선거법 개정 및 사법부 장악, 미디어 통제 등을 통해 권력에 유리한 방식으로 제도를 수정. 튀르키예의 에르도안의 경우 의회 권한 축소, 총리제 폐지 등을 통한 대통령 권한 강화 등. 트럼프 집권 시기 미국 역시 선거의 공정성에 대한 공격, 참여의 제한 시도, 언론에 대한 공격 등 Backsliding을 경험(<The Guardian>, "US added to list of 'backsliding' democracies for first time", 2021.11.22.).
#5
한국으로 돌아와서, 쟁점은 두 가지로 축약됨: (1) 현재 윤석열 정부의 행태를 Democratic Backsliding이라고 부를 수 있나? (2) 만약 Backsliding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후 정권이 교체되었을 때 회복될 수 있을까? 먼저 Backsliding이라고 볼 수 있을 법한 케이스들을 살펴볼 필요. 윤석열 정부는 집권기부터 지금까지 Backsliding으로 의심되는 행태들을 매우, 자주 보여왔음.
#6
여러 사례들이 있지만 여기서 내가 세운 기준은 세 가지. 엄밀하게 세운 기준은 아니지만, 현재까지 지적된 backsliding에 해당하는 사례를 걸러내기에는 엉성하나마 나쁘지 않은 기준으로 생각함.
(1) 제도적 차원에서 의도적/전략적으로 권한을 축소하거나 강화하는 침식행위가 있었는가?
(2) 시민사회에 대한 공격(참여의 축소 및 제한, 시민사회의 자율성 훼손, 언론에 대한 공격 등)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는가?
(3) 폭력적 담론 혹은 상대 정당/세력에 대한 축출/배제/제거를 선동하는 행위를 방조/조장/묵인하였는가?
#7-1
먼저 (1)의 경우 대표적으로 두 가지 사례를 언급할 수 있음. 늘어나는 시행령 정치와 대통령 거부권 행사. <시사인>의 보도에 따르면 대통령 취임 후 1년 간 대통령령 추진 및 공포 건수가 전임 정부에 비해 200건 가량 높음(<시사인>, "시행령 정치, 윤석열 정부의 시행령 전수조사 해보니", 2023.05.31. 819호). 이러한 행태는 여소야대 정국에서 대통령이 자신이 공약하거나 추진하고자 하는 법안에 대해 의회를 우회하여 입법하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음. 거부권 행사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의회를 견제하는 수단으로서 활용했을 수 있음.
#7-2
문제는 이것이 '의도적/전략적' 차원인가는 분별해낼 수 없다는 것. 타국의 backsliding 사례에서 대통령/정부수반이 의회를 우회하고 행정권력을 강화하는 경우는 상당히 흔함. 삼권분립을 뒤흔들거나 훼손할 수 있다는 측면의 비판은 제기할 수 있지만 이것이 민주주의의 후퇴인가? 라고 묻는다면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대답은 "알 수 없다."
#8
(2)의 사례는 보다 분명한 backsliding 사례들이 있음.
(i) 현재 윤석열 정부는 공개적으로 집회, 시위의 자유를 제한하려고 시도함. 명목은 공공질서 수호. 심지어 이러한 집회 제한 시도를 보수 언론과 관제 토론을 동원해 정당화하려 시도(<조선비즈>, "대통령실, '집회시위 제재 강화' 국민 토론 찬성 의견 우세", 2023.06.24.). 대통령실이 집회시위 제한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한 국민참여토론의 경우 찬성은 중복응답이 가능한 것으로 파악됨. 즉, 조작 가능성 다분.
(ii) KBS와 MBC 등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이 진행 중. 방통위원장으로 임명될 것이 유력한 이동관 후보의 경우 과거 MB 정부에서 정권 비판적인 언론인을 색출하는 작업을 진행한 이력이 있음(<KBS>, "국정원 직원 "이동관 청와대 홍보수석실이 문건 지시"", 2013.06.28.).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에 대한 정부의 공개적인 압박이 현재 진행형. 가까운 미래에 언론 자유 지수가 하락할 것으로 전망.
(iii) 노동조합에 대한 광범위한 공격. 건설노조에 대한 '건폭' 낙인,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비난 등 노동조합 전반에 대한 정부 주도의 공격이 진행 중. 양회동 씨의 사망에 대해서는 '유서 조작'이라는 희대의 가짜뉴스로 노동조합에 대한 혐오 정서를 부추김(<MBC>, ""양회동 유족에 사과"…'유서대필 의혹' 월간조선 오보 인정", 2023.05.31.). ILO는 현재 한국 상황을 예의주시하는 중. 이미 ILO는 한국에 권고안을 내린 적이 있음(<연합뉴스>, "공공기관 노동자들, "ILO 권고대로 교섭권 적극 보장해야"", 2023.06.20.).
#9
전반적으로 언론과 시민사회에 대한 공격이 상당히 노골적으로 진행되는 중. 내년도 앰네스티 연례보고서나 미국 국무부 연례 인권보고서에 한국을 향한 shaming이 들어갈 수 있을 가능성. 요컨대 시민사회 측면에서는 backsliding이 진행 중이라고 봄.
#10-1
(3)의 측면은 다소 논쟁적일 수 있는데, 왜냐하면 경쟁 세력에 대한 극단적 언동은 어느 정권에서나 존재했기 때문. 문재인 정부 시기만 하더라도 '토착왜구' 등 친일파 프레임이 상당한 힘을 얻었고 문재인 정부 역시 이러한 여론을 등에 업고 적극적인 반일 정책일 펼친 바 있음. 극단주의적 전위대를 동원하여 정책을 정당화하거나 혹은 경쟁세력을 공격하는 일은 정권의 성향을 막론하고 은밀하게 혹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일. 이는 앞으로도 지속될 문제.
#10-2
다만 이번 윤석열 정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정부 주도로 지속적인 시민사회/언론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에 극우적 여론이 편승하고 있다는 점. 정부 주도로 시민사회/언론/노동조합에 대한 낙인 찍기를 시도하고, 이를 극우 여론이 정당화하고 있다는 것. 중요한 것은 권력자의 시그널링. 미국 대선 당시 트럼프 낙선에 항의해 의회를 점거한 폭동의 경우 트럼프가 지속적으로 선거에 불복한다는 메세지를 보냈기 때문. 극단적 지지층이 물리적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은 언제나 권력자들의 시그널링이 핵심 열쇠. 그런 점에서 윤석열 정부가 검찰 권력을 앞세워 지속적으로 시민사회에 대한 공격을 이어가는 것은 극단주의 세력이 활동을 보다 노골적으로 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다고 평가할 수 있을 듯. 모델링을 해봐야 알겠지만, 과거보다 폭력적/극단적 발언의 빈도가 늘었다는 인상.
#10-3
전임 정부를 "반국가세력"으로 규정한 대통령의 발언이 나옴(<경향신문>, "윤 대통령, 문재인 정부 겨냥 "반국가세력들이 종전선언 노래 불러"", 2023.06.28.). 전임 정부 지우기를 시도하는 사례는 반복되어 왔지만 합법적 정당성을 획득한 전임 정부와 상대 정당에 대해 '적'으로 규정하는 극단적 언동을 대통령이 노골적으로 발언한 첫 사례일 듯.
#11-1
전반적으로 나는 윤석열 정부 하에서 democratic backsliding이 분명히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함. 문제는 이것이 다음 정권 혹은 가까운 시일 안에 회복될 가능성. 회복되기 비교적 쉬운 부분과 회복하기 어려운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을 듯.
#11-2
첫째, 언론자유와 같은 제도적 영역은 비교적 쉽게 정상화될 수 있음. 문재인 정부 하에서 언론자유 지수 증가. 이는 적절한 개입이 있다면 충분히 회복할 수 있는 영역으로 판단됨. 둘째, 시민사회의 자율 영역, 예를 들어 노동조합의 조직력/교섭력이라든지, 자생적 시민단체의 성장과 같은 부분은 회복이 어려울 수 있음. 정부 주도로 파괴된 시민사회는 회복력을 가지기 쉽지 않음. 파괴된 노동조합을 다시 조직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 셋째, 대통령이 점점 더 강경한 발언을 노골적으로 내비침에 따라 당분간 극우 집단의 폭력적 선동이 수면 위로 드러날 가능성.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상대 정당을 "적"으로 규정한 사례는 없었음. 정치 갈등은 당분간 더욱 격화할 것.
#12
제법 오래 전에 '사회적 대타협'이 필요하다는 주장들이 나온 적이 있는데, 지금으로선 그 시기는 물 건너간 듯. 아마 당분간의 한국 정치는 사실상 내전 상태로 돌입하지 않을까. 한국의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이 이걸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지는 좀 더 두고볼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