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시즘의 광기가 무섭게 전염되고 있는 듯 하다. 이제는 이에 대해 말을 해야 할 시점이라고 본다. 파시즘의 끔찍함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기 때문에 정리 차원에서 적어둔다. 아래 내용은 엄밀한 논의는 아니며, 다만 추후 쓰게 될 다른 글을 위한 스케치 차원이다.
파시즘이 끔찍한 이유는 단순히 세계대전을 불러올 정도로 파괴적이라는 데에 있지 않다. 전쟁은 파시즘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파시즘은 매우 파괴적인 열정이며, 광기를 동원한 ‘대중 운동’이다. 바꿔 말해 파시즘은 ‘증오’를 동원하는 체제다. 그렇기에 파시즘은 ‘거의 모든 것’을 파괴한다. 파시즘이 유일하게 파괴하지 않는 것은 지도자 1인 뿐이다. 한국 상황에서라면 윤석열과 전광훈 정도가 그 대상일 것이다.
파시즘의 기본적인 통치 전략은 쉽게 말하면 ‘내로남불’이다. 일반적인 민주적 원칙 하에서 파시스트들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별로 없다. 선거에서는 소수파일 것이고, 극단주의로 인해 처벌받는 사례도 빈번하다. 음모론은 먹혀들 여지가 별로 없다.
그렇기에 파시스트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하는 전략은 크게 두 가지다. 자신들의 세력이 미약할 때에는 민주적 원칙에 기대어 생존한다. 그들은 소수파를 존중해야 한다는 민주적 원칙을 들이밀며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자신들이 다수파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순간, 민주적 질서의 정당성을 지속적으로 훼손하고 흠집내기 시작한다. 선거에 불복하고, 일반적으로 존중되어야 할 독립적 기관의 위상을 ‘정치화’함으로써 마치 ‘편가르기’ 문제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종국에는 민주적 원칙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신들을 살려주었던 그 원칙들을 말이다.
뿐만 아니라 거짓정보를 퍼뜨리고, 반지성주의를 선동한다. 특히, 음모론에 적극적으로 편승하면서 대중의 분노와 광기를 자극한다. 이미 검증된 내용조차 새로운 음모론을 덧붙여 공격한다. 잘 작동하는 민주주의 체제라면 음모론과 반지성주의적 주장에 대해 전문가와 권위 있는 기관이 나서 검증하고, 음모론을 주장하는 이들의 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가 “음모론”이라며 일축했을 것이다. 거짓정보는 언론과 시민사회에 의해 웬만하면 검증된다. 그러나 파시스트들은 끊임없이 거짓정보를 생산하고, 거짓된 정보를 공공연하게 인용한다.
음모론은 대중을 동원하는 가장 편리한 수단이다. 일반 시민이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정치로 인해 ‘피해를 보고 있다’라는 감정은 남아있다. 그 감정과 울분의 원인을 규정해주는 것이 음모론이다. 이런 음모론은 반드시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저 인간들이 내 것을 빼앗아가고 있다”라는 원초적인 감정을 자극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파시즘은 증오를 동원해야만 유지할 수 있는 체제다.
파시즘 체제는 그 근간이 증오를 동원하는 체제인 까닭에 정보의 유통 또한 굉장히 제한된다. 건강하고 올바른 정보라고 할지라도 ‘정치적으로 불리한’ 정보라면 공격받게 된다. 파시스트들에게 진실이나 사실이 무엇인지는 딱히 중요하지 않다. 파시스트들에게 정보의 품질을 담보해주는 것은 ‘우리 편에게 이득이 되는지’ 여부 뿐이다. 증오를 극대화하여 동원할 수 있다면 오염된 정보라 할지라도 선택된다(음모론이 파시스트들의 강력한 무기이기도 한 이유이다).
예를 들어 “중국인 간첩 99명” 음모론은 그 출처도 불분명하고 미국이 직접 ‘거짓’이라고 밝힌 정보임에도 여전히 사실이라고 믿어지고 있다(JTBC뉴스, 25.01.20.). 민주주의가 권위주의 체제보다 좋은 이유는 정보가 공개적으로 유통되고 좋은 정보를 전달할 유인을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에서는 종종 정보의 제공자들이 처벌의 두려움 때문에 정보를 왜곡한다. 그리고 왜곡된 정보는 오판을 불러 일으킨다. 파시즘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소프트한’ 권위주의 체제보다 정보의 왜곡이 더 심각하다. 충성스러운 관료집단에 의해 한동안은 유지될 수 있겠지만, 결국 왜곡된 정보가 넘치게 된다.
파시스트들에 의해 희생양으로 지목된 대상은 군중의 광기에 처절하게 희생된다. 그들은 일상적인 폭력과 린치에 노출되고, 법적으로 추방되거나 합당한 지위를 부여받지 못할 수 있다. 가장 끔찍한 사례로는 그저 ‘처분’될 뿐이다(여기서 ‘처분’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다들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핵심은 파시스트들이 “누군가를 제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선동”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렇게 폭력적인 주장이 ‘정당한 통치 원리’로 인정받을 수는 없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곧바로 강력한 국민적 저항에 부딪힐 것이다. 이를 군대를 동원해 상시적으로 억누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파시스트들은 민간 영역의 폭력조직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파시스트들은 민간 영역에서 공공연한 테러를 조장한다. 즉, “정치깡패”들을 조직함으로써 민간 영역에서 폭력을 공공연하게 선동하고, 정치적 반대자들을 공격하도록 사주한다. 서부지법 폭동이나 백골단의 등장은 우연이 아니다.
특정한 대상이 희생되었다고 치자. 대중의 분노가 사그라들고 세상이 평화를 되찾겠는가? 그럴 일은 없다. 애초에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소멸시켜야 할 적’으로 설정하는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인류의 역사가 알려주는 진실이다. 그 어떤 문제도 ‘누군가를 제거’함으로써 해결된 적은 없다. 그런 접근 방식은 문제를 올바로 규명하지도 못할 뿐더러 현실과도 동떨어진 진단이다. 진단이 틀렸는데 처방이 올바를 리 없다. 그러니 누군가를 제거해도 뭔가 나아지는 일은 없다.
파시스트들은 그렇기에 희생양을 계속 찾아나선다. 이민자, 난민, 여성, 게이, 레즈비언, 기타 등등. 지금 극우들이 외치는 것처럼 “중국인”들을 전부 국내에서 추방했다고 치자.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나? 그들은 아마 답하지 못할 것이다. 해결되는 게 없을 것이기 때문에. 파시스트들은 누군가를 제거한 후에는 또다른 제거 대상을 찾아나선다.
여기서 중요한 건 파시스트들은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 없다는 점이다. 문제를 적당히 방치하면서, 그 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증오를 이용한다. 희생양을 지목함으로써 증오를 극대화하고, 이를 통해 권력을 유지한다. 이런 점에서 파시즘은 대단한 이념이나 사상이라기보다는 권력을 파렴치한 방식으로 유지하는 메커니즘이다. 파시즘은 그렇게 모든 것을 파괴해 나간다. 이웃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파괴한다. 만약 ‘내부의 적’이 없다면 ‘외부의 적’으로 눈을 돌린다. 파시스트들에게 ‘적’의 필요성은 그 무엇보다 절대적이다.
파시스트들이 끔찍한 또다른 이유는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하는 상황을 하나의 통치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파시스트들이 권력을 잡고 가장 먼저 추진하는 것은 정치적 반대파의 완전한 제거다. 그들은 자신들의 집권 명분을 ‘혼란스러운 정국을 타개하고 거악을 일소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물론, ‘거악’에는 자신을 향한 정치적 반대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을 향한 정치적 반대를 ‘반국가적’이라고 주장한다. 자신들은 국가의 거악을 일소하기 위해 국민의 부름을 받았으므로 정치적 반대는 있을 수 없다는 논리다.
그러나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정치적 반대자를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그러므로 파시스트들에게 국가는 늘 비상사태여야 한다. 정치적 반대자를 물리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비상사태’가 제공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은 대단히 폭력적이고 반민주적으로 진행된다.
전쟁은 극단적 열정을 동원하는 거대한 정치다. 이런 상황은 ‘정치적 반대자’를 제거할 절호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 점을 이용하여 파시스트들은 전쟁을 일으키거나 혹은 전쟁 분위기를 조장함으로써 정치적 반대자를 제거할 기회를 잡으려 노력한다. 윤석열의 12.3 내란 시도는 명백하게 비상사태를 이유로 정치적 반대자를 제거하려 한 쿠데타였다. 전쟁을 일으키거나 일으키지 않는 요인은 그저 국가가 전쟁을 수행할 만한 충분한 무력이 있느냐의 여부일 뿐이다. 핵심은 ‘전쟁’ 그 자체가 아니라 ‘전쟁’과 ‘전쟁 분위기’가 가져다 주는 파괴적 열정이다.
파시즘이 지배하는 체제에서는 ‘평화적 정권 교체’라는 민주주의적 이상을 달성할 수 없다. 다소 비관적인 이야기이지만, 파시즘의 광기에 물든 인간을 되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인간은 자신이 믿기로 결정한 것을 쉽게 바꾸지 않는 법이다. 독일이 파시즘의 광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참혹한 희생을 치르고 비참하게 패배한 2차대전의 악몽과 함께 홀로코스트라는 희대의 살육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처벌’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고 있는 형국이다.
나는 현재 시점에서 한국에서도 파시즘의 광기가 이미 도래했다고 평가한다. 앞으로 남은 이벤트들의 결과에 따라 반영구적인 암흑기에 접어들지, 아니면 민주주의 체제의 회복 탄력성을 보여줄지 기로에 서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