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의 숙주가 되어버린 개신교
한국 사회가 파시즘에 물들고 있다고 지적한다면, 그 핵심 세력이 누구인가를 함께 말해야 한다. 지금 시점에 이르러 그 핵심이 누구인지는 분명해진 것 같다. 현재 탄핵반대집회를 이끄는 주 핵심 세력은 전광훈과 손현보를 위시한 개신교 집단이다. 현재 탄핵반대집회를 주도하고 있는 세력은 크게 두 부류로, 하나는 전광훈 목사를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 바로세우기 운동본부’이고, 다른 하나는 손현보 목사의 세계로교회를 중심으로 한 ‘세이브 코리아’이다. 전광훈 목사와 손현보 목사가 번갈아 가며 용인하기 어려운 정신 나간 주장들을 쏟아내고 있다는 사실이야 두말할 나위 없다.
한국의 개신교는 명백하게 파시즘과 극단주의의 숙주가 되었다. 더 이상 소수 세력으로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의미한 정치세력을 이루었고, 실제로 이들은 서부지법 폭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서부지법 폭동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된 사람 중 한 사람은 현재의 탄핵반대집회를 ‘종교 전쟁’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는 현재 탄핵반대집회의 중심 세력이 극단주의 개신교 집단이라는 사실을 함축한다. 전광훈은, 사진에서도 보다시피, 민주적 질서를 폐기하자는 주장은 물론이거니와 신정국가적 질서를 세우겠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탄핵 인용 이후를 생각해보면, 극단주의 개신교 집단은 실질적인 테러 집단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이들의 세계관 속에서 윤석열의 탄핵은 곧 “중국에 나라를 팔아먹는” 일이므로, 윤석열의 파면 자체를 수용하지 못할 것이다. 윤석열의 복귀가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이는 집단인 만큼, '성전'을 주장하며 실제로 테러행위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극단주의 개신교 세력을 중심으로 헌법재판소의 독립성을 훼손하며 공격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윤석열의 파면에 불복하기 위한 사전작업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이들을 지배하고 있는 정서는 존재론적 위기감이다. 기존 게임의 룰에서 패배를 수용하지 못하는 자들은 종종 판을 뒤엎는다. 그러나 이들이 뒤엎으려는 판은 민주적 질서 그 자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현재의 목표가 ‘민주적 질서의 수호’라면, 탄핵이 인용되고 윤석열이 파면된 이후 반드시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극단주의 개신교 세력에 대한 ‘궤멸적 타격’이다.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해서는 아마 이견이 있을 것이다. 난 개신교의 생태계를 잘 알지 못하고, 또 개신교가 기존에 수행하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 또한 알지 못한다. 관련해서는 잘 아시는 선생님이 계시다면 이 논의를 이어받아 구체적인 이야기를 다뤄주시면 좋겠다.
오해를 방지하고자 미리 언급해두자면, ‘개신교 전체에 대한 말살’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어야 하겠다. 극단주의 개신교를 타격하자는 주장은 종종 ‘개신교를 말살하라’는 주장으로 오해를 받곤 한다. 종교가 가지는 힘은 강력하다. 때로 종교가 가져다 주는 신실함은 인간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양심의 발현을 촉진하기도 한다. 종교가 수행하는 일정한 사회적 역할도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천주교 신자였던 적이 있기도 하거니와, 보다 현실적으로는, 종교를 말살하자는 주장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누군가의 강제에 의해 신념과 신앙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고 가능하지도 않다는 점을, 인류의 역사가 또렷하게 증언한다. 가까이는, 내 주변에도 신실하고 선한 종교인들이 많다. 나는 그들의 신앙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극단주의, 근본주의는 이야기가 다른 것이다. 나는 극단주의 개신교에 어떤 ‘비즈니스 모델’이 있다고 보고, 이를 정밀하게 타격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조금 더 구체화된 생각으로 두 가지 정도 제시할 수 있겠다.
① 사회와 유리된 규범을 학습하는 독립된 네트워크의 존재
극단주의 집단의 성장 배경에는 반드시 사회적 규범이 아닌 ‘자신들만의’ 규범을 학습하는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탈레반이 그랬고, 신천지, 정명석의 JMS가 그렇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새로운 질서 속의 새로운 왕이 되려는 자들이다. 기존의 세속적 규범 안에서는 왕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왕국의 규범을 신민들에게 학습시켜야만 한다.
개신교를 중심으로 대안학교를 확대하려는 움직임은 우연히 벌어진 것이 아니다. 이들은 공공연하게 창조과학(지적설계론)을 주장하고, 이것을 교육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창조론은 근본주의 개신교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핵심 교리 중 하나다. 창조론이 얼마나 비과학적이며 심지어 과학에 해로운지에 대해서는 후술하겠지만, ‘창조론 vs. 진화론’의 국가적 버전이었던 2005년 미국 도버 재판이 한 예시가 될 것이다.
대안학교 뿐만 아니라 가정, 그들 자신의 커뮤니티, 다른 집단과의 교류 등 이들이 민주적 규범과는 거리가 먼 ‘신정국가적 질서’를 학습하는 네트워크가 광범하게 형성되어 있을 것으로 본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자체적으로 형성한 네트워크는 기존 사회와 분리되어 있으며, 이들이 네트워크를 통해 학습하는 규범이 최소한 기존 사회의 규범과 유리되어 있거나 최악의 경우 전복을 기도하는 수준으로 극단적일 것이라는 점이다.
탈레반의 성장과 탈레반 전사의 양성과정, 그리고 그들이 무장세력을 이루고 종국에는 아프가니스탄이라는 국가를 집어삼키기까지, 그 전반 과정을 검토해본다면 아마 극단주의 개신교의 성장과정과 매우 유사할 것이라고 본다.
② 극단주의 네트워크를 유지하기 위한 자금의 흐름
어떤 조직이든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주지하다시피 극단주의 개신교 계열에는 그들의 집단을 유지하고 존속시키기 위한 수익사업 모델이 존재한다. 구체적인 양상은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하겠지만, 어쨌든 핵심은 돈이다. 어떤 극단주의 집단을 막론하고 그들을 유지하는 자금줄이 있게 마련이다.
전광훈은 탄핵반대집회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지세력을 바탕으로 알뜰폰 등 활발한 수익사업을 벌이고 있다. 손현보 목사의 경우 애터미(atomy)와의 유착관계가 의심된다는 전광훈의 주장이 있었다.
핵심은 이들이 ‘누구로부터’ 자금을 지원 받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들의 자금에는 일정한 흐름이 있을 것이다.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조직의 규모를 키우고, 종국에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까지 넓은 범위에 걸친 자금 흐름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자금 흐름을 알게 되면 Pinpoint strike이 가능해진다. 앞서 말했듯이 “개신교 전체”를 말살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므로, 극단주의 집단에 대한 정밀 타격이 필요한 것이다. 그 중 하나로 이들 자금 흐름의 원천을 추적하고 그것을 차단하는 것이 효과적인 전략일 수 있다.
또다른 사례로는 개신교회가 주도해온 지역사회에서의 봉사 또는 복지활동이다. 극단주의 집단이 지역사회로 파고들어 세력을 확장하는 경로 중 하나는 지역사회에서의 복지 활동일 수 있다. 이 또한 고백하자면, 나는 지역사회에서 개신교가 활동하는 구체적인 양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지난 박근혜 탄핵 반대로부터 유구히 이어져온 개신교 극단주의의 상당수가 노년층이라는 점, 그리고 한국사회의 노인 복지가 상당히 낮은 수준이고, 개신교계가 이를 일정 부분 대신하고 있다는 점은 이들이 대규모로 노년계층을 동원하는 힘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에 기댄 생각이다. 구체적인 규모, 양상, 전개 등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이 계시다면 조언이 필요한 부분이다.
극단주의를 제어하는 방법에 대해
(1) Naming and Shaming?
극단주의 개신교에 대한 ‘궤멸적 타격’이 어떤 수준에서, 어떤 방식으로, 어떤 수단을 동원하여 이뤄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이견이 갈릴 것이다. 선택하지 말아야 할 것은 분명하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인간의 신념을 강제로 바꾸겠다는 행위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시민사회 수준에서 극단주의 집단을 고립시키는 방법 중 하나는 그들의 비위행위를 자꾸 공개적으로 호명하는 것이다. Naming and Shaming으로 일컫는 전략이다. 본래 Naming and Shaming은 글자 그대로 ‘부끄럽게 함으로써’, 즉 평판 비용reputation cost을 발생시킴으로써 행동을 제약하는 원리이다. 여기서 평판비용은 반드시 구체적인 물리적 실체를 가질 필요는 없다. 추상적으로 집단이 내재하고 있는 가치를 훼손시키는 것 또한 평판 비용의 일종이다.
Naming and Shaming을 효과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한 조건 중 하나는 강한 시민사회의 형성과 이에 기반한 자생적 감시 네트워크의 구축이다. 이 때 ‘자생적 감시 네트워크의 구축’에는 기존에 형성된 권위 있는 집단의 적극적인 참여 또한 포함된다. 중요한 것은 ‘평가’를 할 수 있는 집단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두 가지 방향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개신교회 집단 안에서 권위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불편부당한 ‘상급단체’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개신교 사회에서 권위 있는 평가를 내릴만한 집단이 있는지, 구속력 있는 결정까진 아니더라도 권위 있는 결정을 내릴만한 집단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장로회나 감리회 등 여러 교단이 존재하는 가운데, 상급 단체 간의 컨센서스가 형성되는 것이 관건일 수 있다. 그러한 환경이 구성된다면, 권위 있는 결정은 극단주의 집단에 대해 유의미한 훼손을 가할 것이고, 그들의 응집력을 약화시킬 것이다.
두번째는 적극적인 개신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감시 네트워크의 구축이다. 이것 또한 현실적인 방향이 될런지는 나로선 알지 못한다. 다만 작은 공동체가 되었든, 큰 규모의 공동체가 되었든, 극단주의에 저항하는 목소리가 커지려면 네트워크가 이뤄져야 한다. 토론회를 열고, 컨퍼런스를 개최하고, 극단주의를 성토하는 목소리를 내고, 목사의 극단주의적 언동을 제재하려는 움직임들이 필요할 것이다. 이미 그런 행동에 나서는 많은 교인들이 계신 것으로 안다. 또한, 권위 있는 외부 기관(연구기관이나 영향력 높은 평가 단체 등)에 의한 평가를 지속적으로 요청하는 것 또한 필요할 것이다.
(2) 또다른 방법: 공개적인 재판과 청문회?
극단주의를 제어하기 위한 방안 중 하나로 공개적인 청문회(또는 토론회)가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극단주의 세력은 자신들이 기반하고 있는 음모론이 공개적으로 검증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음모론이 주는 파괴적 열정만을 동원하고 싶어한다. 그런 점에서 자꾸만 공개적으로 소환하고 '공개적으로' 검증하는 것 또한 효과적일 수 있다. 앞서 말한 Naming and Shaming 전략의 변형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시사점이 될 만한 두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극단주의 개신교를 떠받치는 하나의 기둥은 근본주의적 세계관이다. 근본주의 세계관은 세속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종교적 질서를 바탕으로 세상을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국가와 사회를 규율하는 규범이 종교적 질서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다.
개신교 근본주의라고 하면 창조론을 빼놓을 수 없다. ‘창조론’은 기독교 세계관을 구성하는 핵심 기둥이다. 그를 위해서는 창조론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이를 ‘국가적 질서’의 토대로 삼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정교분리의 원칙이 핵심인 민주국가에서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창조론자(근본주의자)들은 이를 돌파하기 위해 창조론을 ‘창조과학’으로 둔갑시켜 공교육의 일환으로 편입하려는 시도를 지속했다.
유튜버 <북툰>은 과학유튜버로서, 창조과학을 아주 멋지게 비판해내는 영상을 제작했다. 그가 올린 콘텐츠 중 미국 연방법원의 ‘창조론 대 진화론’ 재판(2005년 도버 재판)은 창조과학이 얼마나 사기성이 짙은 유사과학인지를 낱낱히 까발리는, 신중하고 명료한 증언들로 가득하다. 영상 속에 등장하는 창조론자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창조과학’에 대해 증명할 수 있는 그 어떤 유효한 반론이나 증거들을 제시하지 못한다. 창조과학의 신봉자인 마이클 비히 교수는 ‘점성술도 과학이다’라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기에 이른다.
이 영상을 통해 짚어볼 수 있는 것은, 근본주의, 극단주의가 본질적으로는 ‘반지성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지성주의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 반지성주의는 기존의 지식 체계를 부정하고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은 기존의 지식에 대해 유의미한 반론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지식을 ‘신뢰할 수 없는’ 증거들만을 제시한다. 음모론이 양산되는 구조 중 하나는 음모론을 입증할만한 유의미한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형성된 사실들을 ‘믿을 수 없는’ 이유들만을 제시하는 것이다.
- 반지성주의는 기존의 지식 체계를 훼손할 수 있다면 사실을 조작하고 왜곡한다. 한 가지 예시로, 광주민주화운동은 이미 역사적 평가가 끝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왜곡된 사실을 퍼뜨리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들의 궁극적 목표는 ‘5.18’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주는 민주적 정당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또다른 예시로는 창조과학이 지속적으로 진화론을 공격하기 위해 진화론에 대해 왜곡된 사실을 퍼뜨리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역시 <북툰>이 잘 정리해놓은 것이 있다.
이런 종류의 반지성주의들은 공개적으로 토론되고 검증됨으로써 격퇴할 수 있다는 점을 도버 재판이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내가 보기에, 도버 재판은 극단주의 개신교를 억제하는 방법 중 하나로서 이들의 극단주의적 세계관을 지속적으로 공론의 장으로 불러들임으로써 비판하는 것이 효과적 전략이 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예컨대, 윤석열의 탄핵을 두고 ‘종교전쟁’이라고 표현하는 이들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발표시키는 것은 어떨까? 왜 종교전쟁이라 생각했으며, 근거는 무엇인가? 그들이 주장하는 ‘공산주의’란 대체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당연히, 정치학자, 사회학자들의 구체적이고 치밀한 반론이 함께 제시되어야 하겠다.
이런 공개적인 토론의 형식이 반드시 ‘과학적 대화’의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해야 하겠다. 반증 가능한 주장, 합의된 정의와 개념이 토론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런 당연함조차 지켜지지 않는 시대라고 평할 수 밖에 없다.
(3) 음모론과 극단주의의 정치적 목표
또다른 하나의 사례로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그래도 지구는 평평하다>를 들 수 있다. 다큐멘터리는 소위 "지구 평면론자"들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관전 포인트는, 다큐에서 주인공 마크 서전트가 “지구는 평평하다”라는 자신들의 주장을 직접 검증한다는 것이다. 결과는 당연히 “지구는 둥글다”라는 사실이다. 물론 마크 서전트는 자신들이 직접 검증을 행했음에도 믿지 않는다.
다큐는 시종일관 진지하게 마크 서전트를 비롯해 “지구 평면론자”들의 생각을 주의깊게 살펴본다. 다큐는 지구 평면설 같은 음모론에 기대는 이유가, 그것이 그들의 ‘탈출구’이기 때문이라고 다소 싱겁게(?) 결론 짓는다. 지구 평면설을 믿는 이들의 삶에서 ‘지구 평면설’을 중심으로 삶의 활력이 불어넣어지는 모습도 목격되고, 서로를 의지하는 모습도 포착된다.
이 다큐가 주는 시사점은 (내가 보기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되는 것 같다. 첫번째는 음모론에 경도되는 이들에게 어쩌면 그런 음모론이 삶의 활력을 불어넣거나, 삶의 의미를 되찾는 과정일 수 있다는 점. 두번째는 음모론을 믿는 이들에게 음모론의 검증을 딱히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믿는 음모론을 ‘사실’로 만들어줄 ‘정치적 승리’라는 점이다.
극단주의 개신교에 이를 대입해 생각해보면 의문스러운 점이 생긴다. 극단주의 개신교에 경도된 이들에게 극단주의가 삶의 활력 중 일부라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함으로써 극단주의를 억제할 수 있을까? 그다지 현실적이지는 않다. 종교를 삶의 일부로 채택한 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승리만을 간절히 염원할 것이다. 다만 이들의 삶의 형태에서 극단주의 개신교가 차지하는 영향력은 주의깊게 들여다볼 필요는 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극단주의 개신교 세력에게 중요한 것이 “정치적 승리”라는 점이다. 음모론은 극단주의 개신교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현재 시점에서 그들을 ‘이해’하는 것보다는 그들이 무엇을 목표하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지. 극단주의 개신교 세력의 핵심에 음모론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이들에게 음모론의 사실 여부는 중요치 않다는 것을 함축한다. 또한 음모론이 극단주의 세력을 뭉치는 구심점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그리고 음모론을 “사실”로 만들어줄 정치적 승리를 목표한다는 점을 살펴야 한다.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단기적 목표일 것이다.
음모론, 반지성주의는 오로지 권력의 유지와 영속을 위해서만 복무한다. 그것은 인류의 공동의 가치를 증진하거나 지식을 진보시키거나 문명을 발전시키거나 공동체를 번영시키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음모론, 반지성주의는 파시즘적 권력이 자신을 정당화하고자 대중을 선동하고 동원하기 위한 수단이다. 조지오웰의 <1984>가 보여주는 디스토피아는 반지성주의를 동원한 권력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냉소를 덧붙이자면
이 글을 쓰면서 여러 잡감들이 들었다. 불렛 포인트로 정리해본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뭉치들이다.
- 광기에 동참한 이들은 처벌의 순간이 오면 자신들의 잘못을 면피하거나 축소하려 할 것이다. “인간이 좀 그럴 수도 있지”라거나, “그 땐 음모가 사실인 줄 알았다”라는 식으로. 광기에 동참한 모든 이들에게 적절한 처벌이 내려지는 것만이, 광기에 대한 경종을 울릴 수 있는 방안이 아닐지. 용서와 타협이, 광기에 동참한 이들과 우리 사이에 필요한 가치일까?
- 반지성주의가 공동체를 파괴하고 경쟁자들보다 퇴보시켰다는 걸 깨달을 즈음에는 이미 사회의 많은 부분이 복구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때에 가서 반지성주의를 선동하고 동참했던 모든 이들은 마찬가지로 책임지려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아직 그들에게 책임을 지게 만드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 그러나 처벌만으로도 쉽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처벌을 회피하기 위해 더욱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해 자신이 지지하는 세력을 승리자로 만들고자 시도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한 내전상태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 모든 권위와 사실에 대해 부정하고, “권위 있는 결정”을 누구도 담보할 수 없게 만들어버리면, 오로지 승리만이 유일한 진실이 된다. 음모론자들, 극단주의자들이 선동하는 반지성주의가 목표하는 바는 이것이다. 기존의 지식 체계, 사실을 뒤흔들고, 왜곡하고, 조작함으로써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만든다. 그렇게 얻어낸 승리는 의미가 있는가? 아마도 그들은 그렇게 얻어낸 승리가 파멸을 가져오더라도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을 것이다.
- 패배에 대한 두려움이 극단주의를 낳았을까? 아니면, 패배를 딛고 다음의 승리를 준비하는 것보다 당장 ‘승리를 도둑맞았다’라는 표현이 주는 도파민 때문에 극단주의가 형성되었을까? 후자가 더욱 문제라면, 무엇을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