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단한 소회
괴물이 끌어내려졌다. 우리 역사에 다시는 존재해서는 안될 파시스트를, 시민의 힘으로 끌어내렸다. 이제 남은 것은 그에게 가장 처절하고 비통한 죽음을 선고하는 일이다. 그가 법정에서 최고형을 언도받고 교수대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에는, 이 모든 사태를 ‘끝났다’라고 말하기 어렵다.
광장의 시민들에게 너무나 큰 빚을 졌다. 연말연초 잦은 야근과 회식으로 인해 광장에 몇번 나가지 못했다. 그나마 할 수 있는거라고는 이렇게 글줄이라도 써서 조금이라도 의견에 힘을 보태는 것인데, 그마저도 크게 도움되진 못한 것 같다. 광장에서 끝까지 버텨준 사람들을 생각하면 괜히 울컥한다. 금요일에 파면 축하 겸 술을 마시고 집에 와서 조금 울었다.
비록 탄핵 선고 주문 전체를 듣진 못했지만, 문형배 재판관의 말은 힘이 있었고, 단호했다. 지난 4개월에 대한 위로가 되는 말들로 선고 전문이 채워졌다. 이보다 더 완벽한 승리 선언은 없다고 본다.
앞으로 해야 할 일
우원식 국회의장이 ‘개헌’ 아젠다를 들고 왔다.
개헌의 필요성은 국민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다. 현재의 헌법 체계 안에서, 무도한 폭군이 언제든지 제도를 악용하려면 얼마든지 악용할 수 있다는 걸 모두가 알았으니까. 민주주의자라면 응당 지켜야 할 규범도 얼마든지 형해화시킬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에 대비할 수 있는 꼼꼼한 개헌이 필요하다는 것 쯤은 모두가 안다.
그러나 꼭 지금 해야 하는 일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글쎄올시다. 지금 필요한 건 국민의힘을 내란 정당으로 해산시키고 내란에 적극 동조한 핵심 인물들에 대한 강력한 처단이다. 이들은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규범을 심각하게 오염시켰고, ‘입법독재’와 같은 허무맹랑한 조어를 퍼뜨림으로써 민주사회의 기본적인 규칙을 공격한 이들이다. 이들에 대한 확실한 청산, 분명한 처벌 없이는 앞으로의 민주공화국은 기대할 수 없다. 아니, 좀 더 극적으로 말하자면, 이들에 대한 처벌 없이 그저 ‘윤석열 탄핵됐으니까’라는 식으로 유야무야 넘어간다면, 그것 자체도 한국의 민주주의를 장기적으로 마비시킬 결정이라고 본다.
오히려 지금 가열차게 논의해야 할 것은 ‘방어적 민주주의’에 대한 것이다. 한국은 극우 세력의 공격에 이미 적나라하게 노출됐고, 그들이 어떻게 시스템을 해킹할 수 있는지도 보았다. 토론, 타협, 합의와 같은 민주주의의 고매한 가치들은 이들의 시스템 해킹과 언어적 오염에 대단히 취약하다. 그러나 한국은 방어적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헌법학계, 정치학계 일부에서 방어적 민주주의에 대한 키워드는 일부 찾아볼 수 있으나, 한국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아직 미진한 상태로 보인다. (대표적으로, 오향미. (2011). 독일 기본법의 “방어적 민주주의” 원리: 그 헌법이론적 논거의 배경. 의정연구, 17(2), 111–139.)
극우 세력에 대한 분명하고도 단호한 조치는 필경 반발을 불러올 것이다. 저들은 ‘정치보복’이라며 더 반발할 게 뻔하다. 그러나 여기에 화해는 없어야 한다. 저들은 분명하게 민주주의를 파괴하려 한 집단이고, 우리는 그런 집단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선례를 남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화해와 타협은 민주적 규범을 존중하는 집단에 대해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못박아둘 필요가 있다.
극우를 처벌하기 위해 어떤 방식이 좋은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할테지만, 개인적으로는 뉘른베르크 재판을 참조하는 게 어떨까 싶다. 아마 현실적으로 ‘모든’ 이들을 처벌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핵심 스피커들에 대해서만큼은 광범하게 처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처벌도 중요하지만, 뉘른베르크 재판을 참조하는 게 좋겠다는 말의 진의는, 사실 ‘기록’에 있다. 12.3 비상 계엄 이후 민주주의를 지탱하던 여러 언어들이 심각하게 오염됐다. ‘계몽령’이라느니, ‘입법독재’ 같은 허무맹랑한 단어는 물론이고, 부정선거 음모론, 선관위 99명 음모론 등, 우리 사회의 신뢰 가치를 훼손하는 악질적인 거짓말도 넘쳐난다. 나는 이 모든 주장들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악질적인지 기록으로 반드시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배인규, 안정권 등 극우 집회를 주도한 인물들은 물론이고, 트위터, 페이스북 등, 블라인드 등 주요 SNS 채널에서 적극적으로 여론을 선동했던 이들에 대해서 대대적인 청문회를 열어보는 것은 어떨까. 선관위 간첩 99명 음모론을 믿는지, 부정선거 음모론을 믿는지, 부정선거가 어떻게 일어난다고 생각하는지, 그걸 증명할 만한 근거는 있는지 등등 이들이 얼마나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는지를 기록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국가적 차원의 ‘조리돌림’이라고 표현하면 될까. 수뇌부만 처벌하는 것은 이제 의미가 없다. 적극 가담한 개인에게도 분명하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 시대가 됐다. 그들은 역사 속에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던 인간들로 영구히 박제되어야 한다.
저들의 주장은 반드시 ‘공개적으로’ 깨져야만 한다. 민주 사회에서 어떤 주장들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점을 단호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헌법재판소가 써낸 이번 판결문은 정말 역사적인 의미와 가치가 깊다.
극우들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예전에 다른 글에서 극우들은 탄핵 인용 이후 더욱 강하게 준동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다행스럽게도(?) 폭력을 선동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나, 탄핵에 승복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체제를 흔들려는 행위들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들이 탄핵을 받아들이겠는가. 이들에게 민주당 집권은 그 자체로 내란인데,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이들의 세계관에서 윤석열은 ‘빨갱이 민주당’을 싹 쓸어버리고 ‘자유민주주의를 바로 세울 구국의 영웅’이다. 그걸 위해서라면 비상계엄 터뜨리고 군대 동원해서 국회 좀 때려부숴도 된다고 믿는 집단이다. 그런 집단이 민주적 규범에 어찌 승복하겠는가.
나중에 쓸 일이 더 있겠다만, 극우들은 앞으로 ‘체제 전쟁’, ‘자유민주주의 수호’, ‘공산화’ 같은 단어들을 주워섬길 것이다. 한국은 체제 전쟁 중이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윤석열 같은 스트롱맨이 등장하여 민주당을 싹 쓸어버려야 한다고 말이다. 부정선거 음모론도 빼놓을 수 없다. 부정선거 음모론은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극우들을 뒷받침하는 핵심 세계관이다. 법원이 아무리 거짓말이라고 해도, 저들에게는 법원조차 ‘선관위와 이익관계를 공유하는’ 집단으로 치부된다.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극우들의 주장들 중 단 한 가지도 들어주거나 용인할 만한 것이 없다는 점이다. 논리적으로도 성립하지 않고, 현실을 잘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현실을 잘 설명하는’ 설명들의 대결이다. 최소한 과학적 대화가 여기에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극우들의 주장은 이러한 기본적인 전제조차 지켜지지 않는다.
음모론적인 접근 중에서도 가장 악질은 부정선거 음모론이다. 음모론은 좌우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때로 의심은 실제 사실로 확인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마냥 음모론 그 자체를 악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 이야기되는 부정선거 음모론은 그런 의심의 수준을 넘어 아예 선거 시스템 자체를 뒤흔드는 주장이다. 평상시였다면 ‘미친 인간’ 취급받았을 주장들을 최소한 20%가 진지하게 믿고 있다는 말이니까, 상당히 심각한 문제다. 이들의 음모론은 철저히 반지성주의적 주장들로 점철되어 있기도 하다.
이런 주장들이 계속 용인된다면 윤석열 같은 인간들이 또 다시 등장하게 된다. 이런 음모론은 반드시 공개적으로 깨져야 한다. 음모론을 말하는 그 즉시, 사회적 관계에 손실이 올 정도로 바보 같은 주장으로 취급 당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 한동안 국회가 내야 할 메시지는 명확하다. 메시지는 분명하고 단호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존중하라.’ 그리고 ‘민주주의가 아닌 것을 민주주의라고 호도하지 말라.’
부록: 헌법재판소 탄핵 결정문 전문 (PDF 포함)
[전문] 헌법재판소 윤석열 파면 결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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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헌법재판소 윤석열 파면 결정문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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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헌법재판소 윤석열 파면 결정문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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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헌법재판소 윤석열 파면 결정문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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