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정당이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민주주의니까. 헌법에 '정당은 그 목적ㆍ조직과 활동이 민주적이어야 하며'라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으니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한다.
냉정하게 따져보자. 정당이 내부적으로 '반드시'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정당이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하는 당위가 있을까? 헌법에서 말하는 '민주적'이라는 것은 얼마나, 어느 정도를 말하는걸까? 민주주의를 마법의 단어처럼 쓰지 않으려면 여기서 말하는 '민주적'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당대표를 평당원이 선출하는 것이 '민주적' 운영인가? 원내대표를 평당원이 선출하는 것이 '민주적' 운영인가? '정당 민주화' 혹은 '당내 민주주의'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사람들은, 미안한 소리지만 여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그저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땡깡을 부리기 위한 수단으로 '정당 민주화'를 호출하는 것이라고 밖에는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 정당은 비민주적이야. 정당 민주화가 필요해. 왜? 내 의견이 안 받아들여졌으니까. 우리 정당은 당내 민주주의가 더 필요해. 왜? 소수 의견도 받아들여야 민주주의니까.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런 주장들이 정당을 '조직'이 아니라 정치 동아리로 만들어버린다. 민주주의 안에 온갖 좋은 말들을 우겨넣고 자신의 이상대로 되지 않았으니 비민주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래서는 민주주의를 달성하기도 어렵고 민주주의의 현실을 완전히 뭉개버린 채 민주주의를 개인의 영달을 위해 끌어다 쓰는 짓일 뿐이다. 개인 간 사담에서야 의견이 다르면 하하호호 웃으면서 네, 그럴 수 있죠, 하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정당이 의사결정을 하거나 정책결정을 할 때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에게 '하하 그럴 수 있죠'하고 넘어가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좋게 말해 소수의견이고 나쁘게 말하면 반란분자다.
한국이 민주주의 체제니까 정당도 민주주의여야 한다? 말장난에 불과하다. 왜 정당이 민주주의여야 하는가? 국가 체제가 민주주의이면 하부 조직도 반드시 민주적이어야 하는가? 국가를 구성하는 여러 구성요소 가운데 가장 비민주적인 조직 중 하나가 기업체들이다. 기업들이 비민주적으로 운영된다고 해서 한국이 비민주주의가 되는가? 국가 체제가 민주주의이면 하부 조직들도 완전한 민주화가 되어야 하는가?
국가 체제로서의 민주주의와 조직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문제다. 단위가 다르다. 조직이 비민주적으로 운영된다고 해서 국가 체제가 비민주주의가 되지 않는다. 국가 체제가 민주주의가 되려면 '정당 간의 민주주의'가 성립하면 된다. 야당이 존재하고, 야당이 권력을 넘겨받을 수 있는 체제라면 일단 최소 요건의 민주주의는 만족할 수 있다. 요컨대 정당 체계가 민주적이면 된다. 그렇게 확보된 국가 수준의 민주주의는 퇴행은 겪을지언정 권위주의로 후퇴하거나 무너질 가능성은 적다.
정당의 제1목표는 집권이다. 정당이 정당으로 생존하려면 우선 집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집권을 위한 '조직'으로서 기능해야 한다. 의사결정권은 누구에게 있는지, 선출의 범위는 어떻게 할지, 참여의 범위를 어떻게 제한하고 확장할지 등등, 당내 민주주의와 연관된 모든 것들은 절대선이나 절대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당이 조직으로서 기능하기 위해 유연하게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다. 내부의 반란분자들을 숙청하고, 리더쉽을 확립하고, 아젠다 세팅을 하고,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등등 정당이 정치적으로 행위하는 모든 것들은 정당이 '조직'으로서 집권 역량을 확보하고 실제로 집권할 수 있도록 성장하는 과정에서 유연하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때로는 독재도 필요한 법이고, 때로는 정말 민주적으로 운영할 필요도 있고 그런 것이다. 내부의 불평분자들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걸 당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용인한다? 조직 운영의 관점에서는 이런 분자들은 숙청하고 내보내야 한다. 서로 뜻이 맞지 않는데 같이 있을 이유가 없다. 어떤 조직이든지 완전히 의견이 같은 집단일 수는 없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후과는 정당이 책임지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공산당식 운영을 옹호하는거냐고 비난할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볼셰비키가 그래서 집권할 수 있었다. 정당이 정말 조직으로서 제대로 기능하게 되면 어떤 무서운 결과가 발생하는지 자신들이 바로 그 사례를 들어놓고 비난의 수단으로 쓴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볼셰비키가 집권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이 정말 '조직'으로서 제대로 기능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당내민주주의는 정당이 필연적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라거나 혹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정당은 정당대로 집권 역량을 기르면 된다. 집권 역량을 기르는데 당내 민주주의가 도움이 된다면 선택할 수 있고, 중요한 정치적 결정의 기로에서 당 대표의 독단적 결정이라도 필요하다면 동원할 수 있다. 진짜로 논의해야 할 것은 당내 민주주의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확보할 것이냐는 점이다. 당 대표를 평당원 100% 선출로 뽑을 것인가, 국민경선제를 할 것인가? 대의원들에게 주어진 권한의 정도를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 지역위원장은 지명할 것인가, 선출할 것인가? 그리고 이렇게 확보된 당내 민주주의가 실제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그게 집권 역량에 도움이 되나? 정책 결정이나 정책 수립에 어떤 효과를 가져오나? 사안별로 구체적으로 보지 않으면 당내민주주의는 그냥 내부의 반대파 혹은 불만분자들이 당내에서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전가의 보도처럼 쓰일 뿐이다.
예나 지금이나 민주주의가 무슨 마법의 단어처럼 사용되는 것이 씁쓸하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그냥 허공에 뜬 이야기만 할 뿐이다. 수사적으로 민주주의를 동원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효과를 얘기했으면 한다.